[사설] 문재인 정부·농식품부 콜라보로 산으로 가는 동물진료비 공시제, 혼란만 부추겨

선행조건 일방적으로 삭제한 문재인 정부와 게시항목 숫자 늘리기에 집착한 농식품부 콜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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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물병원의 진료비 게시 모습. 금액은 적혀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비용이 다르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당연한 얘기다.

올해부터 동물진료비 게시항목이 20개로 늘었다. 이에 따라 전국 동물병원이 게시한 진료비를 조사해 비교사이트에 공개하는 동물진료비 공시제 역시 20개 항목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동물 의료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겠다”며 시행된 공시제는 산으로 가고 있다. 소비자의 알권리를 보장하기는커녕, 현장의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정부가 원한 그림은 ‘A진료는 5만원, B항목은 10만원’처럼 정확한 금액을 게시하고, 이를 비교하여 보호자들의 선택을 돕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동물병원에 가서 보호자들에게 진료비 게시·공시가 도움이 되는지 물어보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상황에 따라 다름, 체중에 따라 상이, 약품의 종류나 투여 경로에 따라 비용 상이” 등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다.

진료비 게시항목 중 하나인 심장사상충 예방비만 봐도 먹는 약, 바르는 약, 주사제가 있으며, 같은 성분의 먹는 약도 오리지널 제품인지 제네릭(카피약)인지에 따라 원가가 다르다. 똑같은 회사의 똑같은 제품이라도 체중에 따라 비용이 다르다. 애초에 체중별로 제품이 출시된다. 그런데 어떻게 ‘심장사상충 예방비’ OO원이라고 진료비를 게시할 수 있나.

실제 본지가 확인한 동물병원도 심장사상충 예방비, 외부기생충 예방비, 광범위 구충비 금액에 대해 비고란에 ‘동물의 체중, 약품의 세부성분, 투여경로 등에 따라 비용 상이’라고만 적혀 있다.

불가능한 걸 하라고 하니 동물병원 현장에서도 난감하고, 보호자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금액은 적을 수 없고, 비고란에 적을 내용만 자꾸 늘어난다.

이런 혼란은 애초에 예상됐다.

동물진료비 게시제도 도입이 논의될 때 수의계에서 “진료비 게시든 공시든 진료항목을 먼저 표준화한 뒤에 시행해야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줄기차게 얘기했다.

2018년 본지 기사 <동물병원 진료비 수가제·공시제, 준비없이 시작하면 혼란만 가중-표준수가제, 공시제 모두 ‘진료항목 표준화’ 선행 필요>에 따르면, 중성화수술을 예로 들면서 “공시제 도입을 위해서도 전제 조건이 있다. 동물병원별로 다른 ‘진료 항목’을 먼저 표준화하여 통일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호자에게 혼란만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18년 8월 1일자 본지 기사

진료항목을 표준화한 뒤, 여기서 게시하라고 하는 진료비 항목은 ‘A1코드+B3코드+C5코드를 말한다’라고 규정되어야 동물병원에서도 혼란이 없고, 정확한 비교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상식적인 내용이다.

이런 수의계의 지적이 설득력을 얻어 수의사법 개정안 초안에는 ‘진료표준화를 먼저 한 뒤 진료비를 게시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2021년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선행조건을 삭제해 버렸다. 현장의 혼란을 모르겠고, 일단 시행부터 해보자는 것이다. 이때는 제20대 대선을 1년도 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고 있던 문 정부가 공약 이행률에 집착하고 있던 시점과 맞물린다.

청와대 국무회의를 통해 삭제된 ‘진료항목 표준화'(@2021년 5월 21일 본지 기사)

‘대통령 공약을 한 곳에 모아 주제별로 분류하고, 이행 정도를 평가해 국민이 손쉽게 공약의 진척 정도를 보여주는 사이트’인 문재인미터는 2021년 문재인 정부의 <반려동물 보호자 부담 완화를 위한 진료체계 개선> 공약을 진행 중(50%)으로 평가했었지만, 2022년 5월 3일 평가에서 100% 완료했다고 분석했다.

동물진료비 사전고지, 게시, 공시 등의 내용을 담은 ‘진료비 수의사법’이 통과된 이후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물진료비 게시제, 공시제는 청와대 국무회의 이후 선결조건(표준화) 없이 통과되어 버렸고, 현재 혼란의 시발점이 됐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 일차적인 잘못이 있다면, 그다음 잘못은 진료비 게시항목 숫자 늘리기에 집착한 농림축산식품부에 있다.

진료비 게시제가 11개 항목으로 우선 시행된 뒤, 진료비 공시제도 11개 항목을 조사해 공개됐다. 처음 진료비 공시가 이뤄진 것은 2023년 8월 3일이다. 역시나 곧바로 <지역 같은데 3300원 vs 5만원… 반려동물 진료비 ‘천차만별’>, <서울 내에서 ‘개 진찰료’ 22배차…반려인들 “진료비 표준화 필요”>, <“동물병원 입원비 50만원? 무서워서 못 가요” 대학병원 1인실보다 비싸다니> 등의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극단적인 최젓값, 최곳값을 가지고 비교한 기사였긴 하지만, 제대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예를 들어, 고양이 하루 입원비 최고비용(50만원)은 단순 입원비가 아니라 수액, 혈액검사 등 검사비용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큰데, 단순히 금액만 비교하니 보호자들에게 오히려 혼란을 준 것이다. 실제 입원비 최고비용(50만원)이 나온 경기도 화성시의 입원비 중간비용은 66,000원이었다.

“A1+B3+C5코드 금액의 합산을 입력하세요”처럼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진료항목 표준화 없이 고양이 입원비를 적으라고 하니, 누구는 단순 입원비를 기록하고, 누구는 여러 가지 처치 비용이 포함된 금액을 적은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진료비 게시제와 공시제가 혼란을 유발하고 있는데, 미비점을 보완해야 할 농식품부는 오히려 진료비 게시항목을 11개에서 20개로 늘리기로 한다.

실적이라도 채우듯 ‘20개’라는 숫자에 꽂힌 행보를 보여준다.

2023년 마련된 동물의료 개선방안 중

농식품부는 2023년 11월 마련한 동물의료 개선 종합대책에서 외이염 치료,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 결막염 치료, 유루증 치료, 중성화수술, 무릎뼈 탈골 수술, 위장관 출혈 치료, 심인성 폐수종 치료, 빈혈 치료 9개 항목을 늘리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코로나(개) 백신, 혈액화학검사, 전해질 검사, 초음파 검사, CT, MRI, 심장사상충 예방, 외부기생충 예방, 광범위 구충 9개 항목으로 바꿨다.

20개라는 숫자는 정해놓고, 이것저것 짜 맞춘 셈이다.

그럼, 교체된 9개 항목은 진료비 게시가 상대적으로 수월할까? 전혀 아니다. 복잡하고 어렵다. ‘혈액화학검사 및 판독료’ 항목만 해도 의료기기별로 패널 구성 방식이 매우 다양하다. 무슨 패널 검사까지의 금액을 조사하겠다는 것인가? 진료비 조사를 수행해야 하는 한국소비자연맹 등도 조사방법 구체화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수의계에서 제시한 선결 조건이 없으면, 어떤 항목을 게시하고 조사해도 똑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20개 항목에 대한 진료비 조사가 곧 시작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마련해도 진료비 조사 설문은 작년보다 길어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럴수록 응답 참여율이나 응답의 정확도도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부정확한 진료비 조사 결과를 비교사이트에 올려놓으면 보호자의 알권리가 정말 증진될까?

선결조건을 일방적으로 삭제한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숫자 늘리기에만 집착한 농식품부의 콜라보로 세금은 세금대로 쓰고, 행정 피로도와 현장의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책임은 누가 지나.

[사설] 문재인 정부·농식품부 콜라보로 산으로 가는 동물진료비 공시제, 혼란만 부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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