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로 풀어낸 수의사의 마음, 전북대 안동춘 교수를 만나다
동물과 인간, 학문과 예술을 잇는 개정판 이야기
수의대생이라면 누구나 해부학을 배웁니다. 생명을 직접 마주하고, 때로는 동물을 희생시키며 배워야 하는 과정 속에서 마음 한 켠에는 늘 미안함과 고민이 자리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려는 수의사가 있는데요, 바로 전북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해부학을 가르치는 안동춘 교수입니다.
동물의 희생을 지켜보는 수의사의 마음을 담아 오랜 시간 동안 집필한 <알기 쉬운 동초제 수궁가> 개정판은 한층 치밀한 해석과 방대한 주석으로 학문적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수의학과 판소리라는 다소 낯선 만남이 이루어진 과정과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데일리벳 학생기자단이 안동춘 교수(사진)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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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고향인 고창에서 판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버킷리스트처럼 언젠가 해보고 싶었지만, 난공불락의 분야라 주저하다가 결국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전공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니 판소리 책을 낸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주저했죠. 마음먹는 데만 4~5년 걸렸습니다.
교수로서 ‘공부해서 남 주자’고 하는 마음이 반 있었고요, 또 당시 판소리 수강생들과 토론하며 얻은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제 마음 반, 타인의 마음 반이 어우러져 시작했습니다.
판소리가 그만큼 매력적이었나 봅니다
판소리는 목소리로 감정을 실어 바로 전달해야 하는 음악이에요. 순간순간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로 내는 음악 중 최고봉입니다.
오페라나 성악은 한 감정을 몇 분간 끌지만, 판소리는 단어 하나마다 표정과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진정한 맛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풍자가 가장 백미인 판소리가 수궁가입니다. 판소리 다섯바탕 중에 인간사의 풍자미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 수궁가입니다.
수궁가를 특별히 더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수의해부학 교수로서 동물을 희생하며 교육하는 과정에서 늘 내면적인 갈등과 미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수의대 행사에서는 동물을 주제로 노래를 하는 것이 수의학도로서 어울린다’는 김남수 교수님의 말씀이 깊이 와 닿았고, 동물을 주제로 한 판소리 <수궁가>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구전 과정에서 의미가 많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해부학 교수로서 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판소리 수강생들의 목소리도 있었고요.
그래서 책을 집필하게 됐습니다. 판소리를 통해 동물을 위로하고 제 마음의 미안함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수의사로서 동물을 살리는 일도 많았지만 연구자로서 희생시켜야 했던 경험도 있었기에, 이 작업은 일종의 반성문 같은 의미였습니다.
이번 개정판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신 부분이 있다면
한의학적 해석을 바로잡고, 동초 김연수 명창과 그 유일한 제자인 오정숙 명창의 창을 비교해 채록해둔 것입니다. 보통 글씨는 판소리 원문이고, 변형된 곳에 굵은 글씨로 본디 표기를 표시했습니다. 각주도 1판에서 오류를 수정하고, 줄이고, 105곳을 늘려 640곳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자랑은 가장 정확한 학술적 근거가 다 들어 있고, 바로 줄을 맞춰 비교하며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궁가> 해석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신 부분이 있나요?
많은 단어가 잘못된 상태로 알고 있고, 축약된 것을 풀어줘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약성가’ 대목에서 ‘비는 일신지조종이요, 담은 일신지표본인듸’ 부분을 대부분 잘못 번역했습니다. ‘비장이 한 몸에서 으뜸이다’로, 또 ‘표본’을 ‘샘플’의 뜻으로 번역해서 ‘쓸개는 한 몸의 표본이다’라고 했지만, 모두 오류입니다.
이런 글귀는 제가 본 여러 한의학 서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한의학에서 오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체를 구성하는 정(精)·기(氣)·신(神)에서 신(神)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심장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오장의 질병은 음양오행 관계를 기반으로 그 병을 받고, 전해주고, 머문다는 이치를 알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표본(標本)은 샘플이 아니라 한의학에서는 질병의 전후 관계, 위치 관계를 뜻합니다. 심장과 쓸개 관계에서 쓸개는 표(標), 심장은 본(本)입니다. 또 ‘송기탕’도 소나무 껍질로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승기악탕’의 변형입니다.
교수님께서 꼽는 <수궁가>의 인상적인 대목은 어디인가요?
전부입니다. 하나 하나 모두 감탄이 나옵니다. 참고로 판소리에서 가장 인기 있고 핵심이 되는 대목을 눈대목이라고 하는데요, 눈대목은 방송에도 많이 나오고 해서 익숙하실 수 있습니다.
<수궁가>에서는 ‘약성가’, ‘어전회의’, ‘가족이별과 고고천변’, ‘범피중류’, ‘토끼 배 가르려는 대목’이 눈대목입니다.
‘고고천변’은 직역하면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 환한 하늘’인데, 별주부가 육지 세상으로 나가서 토끼를 붙잡으러 갈 때 육지 세상을 처음 보고 육지의 황홀한 풍경을 쭉 읊조리는 장면입니다.
또 ‘범피중류’는 별주부가 토끼를 업고 용궁으로 돌아가며 진양조로 약 9분간 부르는 대목으로, 판소리꾼의 진수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해부학자라서 그런지 ‘토끼 배 가르려는 대목(토끼가 용왕을 구변으로 속이는 대목/토끼 발악 대목)’도 좋아합니다.

교수님께서 수의사가 예술을 꼭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음악과 예술은 인간 내면의 꽃과 같아요. 핵심만 말하자면, 영혼을 정화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이거든요.
육체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조치해도 치료가 되지만, 영혼은 양쪽의 마음이 일치해야 치유가 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고민 속에서 내 영혼을 돌보려면 음악이나 예술이 필수입니다.
또한 음악이나 예술은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회 풍조와 의식을 높일 수도 있어요. 듣거나 즐기기만 해도 내면이 성장하고 고양됩니다. 그래서 수의사가 아니라 사람은 음악이나 예술을 꼭 해야 합니다. 즐기는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번 책을 통해 독자, 특히 수의대생이나 수의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이 책은 동물을 희생해온 수의사의 반성문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동물의 시각에서 인간사를 풍자하는 <수궁가>의 매력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현실과 환상, 풍자와 해학이 어우러진 작품이라는 점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을 예술로, 해학으로 풍자하고 있어요.
현재의 수궁가가 형성된 배경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수궁가 바탕이 된 이야기와 판소리 퇴별가, 유성준 선생의 수궁가, 또 그것을 기초로 동초제를 만든 동초 김연수 선생은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확신에 찬 것 대부분은 환상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또는 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환상인가 하는 점을 정확히, 사람과 동물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고, 정확한 진료, 나아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수의학도라면 의문을 가질 만한 대목들이 많습니다. 단순히 국문학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생명과학적 사고로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판소리와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신재효 선생님 ‘퇴별가’는 해석이 70%정도 진척되어 있고, 심청가 번역 작업을 준비 중입니다. 오역된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되어 바로잡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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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춘 교수에게 <수궁가>는 단순한 판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동물을 통해 인간사를 비추는 거울이자,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묻는 질문이며, 수의사로서 남긴 반성문입니다.
그는 음악과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판소리를 통해 삶의 무게를 해학으로 풀어내듯, 그의 학문과 예술의 여정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수궁가를 완성한 그는 오늘도 또 다른 판소리 속에서 학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황유진 기자 pinkberryh12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