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기반의학] 권위에서 해방된 의학, 형식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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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기반의학(EBM)의 탄생은 본래 해방이었습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권위자가 그렇다는데”

라는 구시대의 권위주의로부터 의학을 해방시키기 위해, 과학적 검증이라는 깃발을 들고 일어난 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보십시오.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습니까?

우리는 권위주의를 몰아낸 자리에 ‘형식주의’라는 또 다른 우상을 앉혀 놓았습니다.

이제는 교수님의 말 대신 “논문에 있는가?”, “가이드라인에 맞는가?”라는 형식적 요건이 절대 권력이 되어, 현장의 살아있는 맥락과 경험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권위에서 벗어나 형식에 매몰된 의학.

저는 오늘, 논문을 과대평가하고 경험을 경시하는 이 기이한 형식주의가 과연 우리 환자들에게 최선인지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논문에 나왔으니 정답이다”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의학사는 완벽한 형식이 현실의 본질을 놓친 사례들로 가득합니다.

1) p값은 유의했지만, 생명은 구하지 못했다 (아테놀롤)

고혈압 약 ‘아테놀롤’은 수많은 RCT에서 혈압 감소 효과를 입증했습니다. 형식은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 Lancet에 발표된 메타분석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약은 혈압 수치라는 대리 지표는 떨어뜨렸지만, 정작 환자의 뇌졸중 예방과 사망률인 본질적 지표에서는 위약과 차이가 없거나 열등했습니다.

결국 영국 NICE Guideline (2006) 가이드라인에서 퇴출당했습니다. 형식(p값)에 매몰되어 본질을 놓친 대표적 오용 사례입니다.

2) 통제된 환경에선 성공했으나, 현실에선 흉기가 되었다 (RALES 연구)

심부전 약 ‘스피로노락톤’은 Randomized Aldactone Evaluation Study(RALES 연구, NEJM, 1999)에서 사망률을 30%나 낮췄습니다.

하지만 2004년 Juurlink 등이 NEJM에 보고한 후속 연구에 따르면, 이 결과가 현실에 적용되자 고칼륨혈증 사망자가 급증했습니다. RCT의 엄격한 모니터링 환경이 바쁜 임상 현장에는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맥락을 가릴 때, 완벽한 증거도 현실에선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1999년 RALES 연구 이후 고칼륨혈증으로 인한 사망률이 증가했다
(자료 : Juurlink DN, Mamdani MM, Lee DS, et al. Rates of hyperkalemia after publication of the Randomized Aldactone Evaluation Study. N Engl J Med. 2004;351(6):543-551.)

3) 메타분석이 ‘진실’을 왜곡했다 (SSRI 항우울제)

근거의 정점이라 불리는 메타분석조차 오염될 수 있습니다. 2008년 Turner가 NEJM에 발표한 연구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학계에 출판된 논문들만 분석했을 때는 94%가 “약효가 있다”고 보고했지만, FDA에 제출되었으나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까지 포함해 재분석하자 긍정적 결과는 51%로 급락했습니다.

이는 출판 바이어스(Publication Bias)이 어떻게 과학적 형식을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형식주의가 낳은 또 다른 병폐는 ‘가이드라인 맹신’입니다. 많은 경우 가이드라인이 절대적인 법전인 것처럼 여깁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비과학적인 진료를 한다고 검열합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가이드라인은 현재 시점의 최선의 과학 지식을 평균 내어 요약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평균적인 환자를 위한 지도이지, 개별 환자를 위한 내비게이션이 아닙니다.

의학계에서는 이를 가이드라인 마비(Guideline Paralysis)라고 부릅니다. 눈앞의 환자는 복합질환과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어 가이드라인과 맞지 않는데, 의사가 형식을 어기는 것이 두려워 환자에게 맞지 않는 표준 치료를 고집하는 현상입니다.

가이드라인은 존중해야 할 ‘기준’이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논문과 가이드라인이 불완전하니, 다시 예전의 “내가 해보니 되더라”는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야 할까요?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이것은 ‘과학의 확장’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경험’은 기억에 의존한 직관이 아닙니다. 엄격한 RCT가 놓친 틈새를 메우는 현장의 데이터(Real World Data)입니다. 논문 만능주의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현장의 데이터까지 포섭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의학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증거기반(Evidence-based)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제가 경계하는 것은 형식주의이지, 과학적 방법론 자체가 아닙니다. 많은 임상수의사분들은 단순한 경험을 근거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기억, 통계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직관은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흘러가는 일화일 뿐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험은 나이브한 경험주의가 아닙니다. 경험이 철저히 기록되고 구조화되어 객관적 데이터의 지위를 획득할 때, 비로소 경험은 형식주의를 보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닙니다. 의학계는 이미 형식주의와 단순 경험주의의 양극단을 넘어, RWE (Real-World Evidence)라는 제3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 RCT의 사각지대를 밝혀내다 (바이옥스 사태)

관절염 치료제 바이옥스는 위장관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대규모 RCT 결과를 등에 엎고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연구설계는 완벽했고, FDA 승인이라는 형식적 면죄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완벽한 형식이 가린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추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약 88,000~140,000명의 심장마비 환자가 발생했고, 최대 6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태를 멈춰 세운 것은 RCT가 아니었습니다. FDA의 David Graham 박사가 Kaiser Permanente라는 미국의 통합 의료시스템의 140만 명 진료 데이터(RWD)를 분석한 결과였습니다.

수천억 원짜리 RCT가 놓친 치명적 위험을, 시스템에 쌓인 현장의 기록이 찾아낸 것입니다. 바이옥스 사태는 RCT가 만능 방패가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때 얼마나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의학사의 가장 뼈아픈 교훈입니다.

2) RCT가 불가능한 영역의 답이 되다 (희귀질환)

환자 수가 극히 적은 희귀질환은 표본 수가 부족해 RCT 수행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형식주의에 따르면 이들은 근거가 없으니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FDA와 EMA는 이제 자연사 연구(Natural History Study)라는 체계화된 현장 데이터(RWD)를 신약 승인의 정식 근거로 인정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아 희귀질환 치료제 ‘Strensiq’입니다. 이 약이 타겟으로 하는 저인산효소증에 걸린 영아는 치료받지 못하면 거의 100% 사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절반의 아기에게 위약을 주는 RCT를 수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제약사는 RCT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병원 창고에 쌓여 있던 과거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끄집어냈습니다. “치료받지 못한 과거의 경험(자연사 대조군)”과 “약을 투여받은 현재의 데이터”를 비교한 것입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과거 기록 속의 환자들은 42%만 생존했지만, 약을 투여받은 환자는 97%가 살았습니다. FDA는 RCT가 없었음에도, 이 기록된 경험의 힘을 인정하고 승인을 내렸습니다. 형식을 갖출 수 없는 곳에서, 구조화된 경험 데이터가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빛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현실, 수의학계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과거의 ‘권위주의’와 싸워 이겼지만, 지금은 ‘형식주의’라는 새로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형식주의가 가장 치명적인 곳이 바로 수의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의학은 단일 종을 대상으로 한 수조 원 규모의 대규모 임상시험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믿을 만한 ‘지도’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의학은 어떻습니까? 종과 품종은 너무나 다양한데, 이를 뒷받침할 대규모 연구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수의학의 지도는 여전히 거대한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공백 앞에서 “논문(형식) 없으면 근거 없다”고 외치는 것은, 지도가 없는 산속에서 나침반도 없이 감으로 길을 찾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빈 지도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바로 현장 수의사들의 ‘치열한 경험’뿐입니다. 수의학에서 경험은 단순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부족한 근거를 메우고, 환자를 살리기 위한 ‘생존의 도구’입니다.

현장의 치열한 경험이 “근거 없다”며 경시당하고, 빈약한 논문과 가이드라인이 과대평가되는 작금의 사태. 이것은 건강한 과학이 아닙니다.

논문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참고 자료입니다. 경험은 비과학이 아니라 수의학의 빈 지도를 채우는 과학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적은, 이 소중한 경험을 무시하고 형식에만 매달리는 우리의 경직된 태도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현장의 치열한 경험을 더 이상 경시하지 않고, 그것이 과학적 근거의 핵심 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로컬의 임상수의사분들이 이 소중한 경험을 기록하고, 반복 관찰됨을 확인하며, 또한 그것을 설명하고 동료들로부터 검토를 받음으로써, 수의학이 가진 거대한 빈틈을 함께 채워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보건대학원

임준식 수의사

[증거기반의학] 권위에서 해방된 의학, 형식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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