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의인물사전 117] 3·1운동 민족대표 34인 ‘스코필드 프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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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의인물사전 117. 스코필드 프랭크(Schofield, Frank William, 1989~1970). 온타리오 수의과대학(현 궬프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석 졸업,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강의, 제암리 양민 학살 사건 사진 촬영 및 해외 신문 기고, 3·1운동 민족대표 34인,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강의(수의병리학), 신약성경반 운영, 2016년 3월 국가보훈부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외국인 최초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안장

우리나라에서 석호필(石虎弼)이라 불리기도 한다.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 주 럭비 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산욕열로 사망하여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학 진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열여덟 살에 혼자 캐나다로 건너갔다.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고 등록금이 마련되자 1907년 온타리오 수의과대학(현 궬프대학교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방학 중에는 목장에서 일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으로 선정됐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음습한 지하실 셋방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과로한 탓에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림에 따라 그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온타리오 주 보건국 세균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토론토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1911년 전문가 학위(professional degree)를 취득하였다.

24세가 되던 1913년에 피아니스트 앨리스(Alice)와 결혼하고 이듬해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세균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캐나다 장로회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비자 발급 거부로 좌절되자 1916년 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당시 서울역 앞 소재) 교장(에비슨Oliver R. Avison)의 권유로 아내와 함께 입국하여 세균학과 위생학을 담당하였다.

단체에는 대체로 대표, 조직, 자금, 홍보 담당자가 필요한데 3.1운동 단체에는 적절한 홍보 담당자가 없었다. 당시 내국인이 시위 장면을 사진 찍고 외국에 기사를 보내면 곧바로 구금되므로 이갑성(李甲成)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스코필드에게 홍보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를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역할은 국제사정을 알려주는 일과, 3.1운동 중 시위자에 대한 일경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

같은 해 4월에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양민 학살 사건과 민가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사진기와 자전거를 챙겨 열차로 수원역에 당도하였다. 이 만행이 해외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경의 검문이 강화되자 일경을 따돌리려고 제암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려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소아마비로 한쪽 발을 쓸 수 없어 외발로만 자전거를 타고 갔으니 그 노고를 짐작할 만하다.

그는 불타버린 제암리교회, 제암리와 수촌리 일대의 민가, 집을 잃고 넋을 잃은 노인과 어린이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해외 신문에 기고하였다. 이러한 일로 그는 두 번이나 테러를 당할 뻔하였다. 그러다 1920년 4월 세브란스 의전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 하는 수 없어 캐나다로 돌아가 모교에서 수의병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5년에 정년퇴임하였다.

1958년 건국 10주년 기념식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장이던 이영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양아들로 삼았으며, 작은 방 하나를 주면 한국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그의 희망에 따라 대학에서는 스코필드를 외국인 교수로 발령 냈으며 그는 수의병리학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는 봉은보육원, 유린보육원, 흥국직업소년학교를 후원하였다. 금요일 저녁에는 서울사대부고 학생, 토요일 저녁에는 숙명여고 학생,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시내 여러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모인 합동반을 대상으로 신약성경반(Bible Class)을 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에게는 학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경기고등학교에서 재학 중이던 김근태(전 복지부장관), 정운찬(전 총리), 이준구(서울대 사회대 교수), 김희준(서울대 자연대 교수), 그리고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삼열(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등이 성경반 수강자였다. 또한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수의학과 안수환(전 수의과학검역원 연구부장)은 그의 장학금 덕분에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70년 4월 임종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양아들로 불린 이영소가 일본수의학회를 다녀와 저녁을 먹던 중 아들 병순(군의관)으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그에게 “영소가 돌아왔어요.”라고 소리치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감은 후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70. 4. 15.). 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업적을 존중하여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96호)에 안장하였다.

1952년 뮌헨대학교(의학), 1962년 토론토대학교(법학), 1963년 경북대학교(수의학), 1964년 고려대학교(법학), 1970년 서울대학교(수의학)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장락이 저술한 『한국 땅에 묻히리라: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전기』(1980)와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2007), 김승태·유진·이항이 저술한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스코필드 박사 자료집』(2012) 등이 그의 면면을 소개하고 있다.

2005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하여 합동강의실의 실내 장식을 보강하여 스코필드홀로 명명하였으며, 당시 정운찬 총장의 기탁금(1,000만 원)을 종자돈으로 하고 수의과대학 교수 일동의 출연금(1억 원)을 더하여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에 스코필드장학기금 계좌를 개설하여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수의과대학 동문, 호랑이스코필드동우회 회원, 일반인들의 성금으로 기금이 증액되어 왔다. 기금의 수익금은 2007년부터 서울 관악 지역의 중학생과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재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되어 왔다. 아울러 스코필드 선양 사업이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과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며 이 행사는 2014년부터 격상되어 서울대학교 행사로 진행되어 왔다. 한편 스코필드의 모교인 캐나다 궬프 수의과대학에서도 매년 추모 행사(Dr. Schofield Memorial Lecture)가 열리고 있다. 글쓴이_양일석

*이 글은 한국 수의학 100여년 역사 속에서 수의학 발전에 기여를 한 인물들의 업적을 총망라한 ‘한국수의인물사전’에 담긴 내용입니다. 대한수의사회와 한국수의사학연구회(회장 신광순)가 2017년 12월 펴낸 ‘한국수의인물사전’은 국내 인사 100여명과 외국 인사 8명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요, 데일리벳에서 양일석 전 서울대 수의대 교수를 비롯한 편찬위원들의 허락을 받고, 한국수의인물사전의 인물들을 한 명 씩 소개합니다. 

– 한국수의인물사전 인물 보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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