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기반의학] 우리가 놓쳐온 증거: 경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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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의학계에서는 이런 공식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논문은 근거이고, 경험은 참고일 뿐이다.”

형식이 갖춰진 연구가 높은 신뢰를 얻고, 임상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 경험은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에 놓이는 구조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익숙한 위계는 수의학 임상의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증거기반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의 원칙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   *   *   *

저는 임상을 업으로 삼지 않는, 연구를 업으로 삼는 역학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임상수의사분들이 마주하는 복잡한 현실과 연구의 간극이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연구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연구가 연구답기 위해서는 현실을 단순화해야 합니다.

이상화된 환경, 제한된 표본, 교란 요인의 제거 등등

이것은 연구의 강점이지만, 동시에 임상 실제와의 간격이 생기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간격은 특히 야생동물의학처럼 변수의 폭이 넓은 분야에서 더 크게 드러납니다.

또한 의학과 달리, 다양한 종과 품종을 동시에 다루는 수의학에서는 동일한 질병이라도 생리, 약동학, 환경 반응이 크게 다릅니다. 연구가 이 모든 변수를 충분히 포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 빈틈을 무엇으로 채울까요?

답은 이미 현장에서 매일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경험입니다.

    

EBM은 처음부터 “연구만을 따르라”는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EBM을 구성하는 세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선의 연구

임상 경험

환자·보호자의 가치

이 세 요소는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전제입니다.

세 요소가 동시에 고려되지 않는 순간, 그 판단은 더 이상 EBM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임상 경험을 근거에서 배제하는 태도는 증거기반의학의 원칙 자체에 반합니다.

   

논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가 근거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거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불확실성이 얼마나 줄었는가”

연구가 아무리 좋은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연구가 실제 임상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해석의 여지가 크게 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논문만을 근거로 삼으려는 태도, 이른바 논문 만능주의는 과학적으로도, EBM의 구조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연구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전제입니다.

   

경험이 주관적이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경험은 근거가 될 수 없다”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경험이 근거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은 명확합니다.

기록되었는가

반복이 확인되었는가

설명 가능성이 있는가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 가능한가

이 네 단계만 통과한다면, 경험은 연구가 다루기 어려운 임상 현실에서 불확실성을 크게 줄이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이미 많은 임상수의사분들이 현장에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영역입니다.

   

임상수의사분들은 연구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논문에서 제외된 환자군,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연구 디자인이 포괄하지 못하는 변수들. 이 영역은 경험 없이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관찰들은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형식을 중심에 둔 관성 때문이었습니다.

경험을 근거에서 밀어내는 순간, 우리는 EBM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EBM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은 근거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근거로 다뤄지기 위한 과정이 미흡했을 뿐입니다.

경험이 기록되고, 공유되고, 설명될 때, 그 경험은 수의학 임상에서 연구와 나란히 불확실성을 줄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출발점은 이미 현장에 있습니다.

임상 수의사분들은 매일 진료실에서, 연구가 포착하지 못한 복잡한 현실 속에서, 불확실성을 줄이는 관찰을 축적해오고 있습니다.

*   *   *   *

증거기반의학은 논문만을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쌓여온 경험을 어떻게 근거로 다룰 것인지, 그 경험이 어떻게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지, 그 질문을 함께 고민하는 방식입니다.

앞으로의 수의학은 연구와 경험이 대립하는 시대가 아니라,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함께 확장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미, 임상 현장에서 축적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보건대학원

임준식 수의사

[증거기반의학] 우리가 놓쳐온 증거: 경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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