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마취, 더 적극적인 통증 관리로’ 한국수의마취통증의학회 창립
창립 기념 심포지움 개최..수의마취통증의학 세계적 권위자 다니엘 팽(Daniel PANG) 교수 초청
한국수의마취통증의학회(KAVAA, Korean Association of Veterinary Anesthesia and Analgesia)가 23일(일) 서울대 수의대 스코필드홀에서 창립총회 및 학술대회를 열고 정식 출범했다.
수의마취통증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다니엘 팽 캐나다 캘거리대학 교수가 창립 기념 기조강연에 나섰다.
과거 외과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던 마취는 국내외 수의 분야에서 별도의 ‘마취통증의학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반려동물이 노령화되고 의료 수준이 높아지며 중증·만성질환을 앓는 환자에 대한 고난도 마취 수요가 늘고 있다. 동물병원에 CT, MRI 보급이 늘어난 점도 마취 수요가 절대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요인이다.
학회는 이날 창립을 기념해 마취통증의학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했다. 마취사고·합병증에 대한 대응부터 양압환기와 심장시술 관련 고난도 마취, 통증 관리 저변 확대, 환경 영향을 고려한 ‘지속가능성’까지 화두를 던졌다. 디팩토(de facto) 아시아수의외과전문의(마취학)인 이인형·손원균·장민 교수와 김현석 박사가 연자로 나섰다.

Blame & Shame을 넘어
마취사고 예방할 새 문화가 필요하다
유럽과 미국의 수의마취통증의학전문의로 국제학술지 Veterinary Anesthesia and Analgesia의 편집장(Editor-in-Chief)으로 널리 알려진 다니엘 팽(Daniel PANG) 교수는 동물병원에서 벌어지는 마취사고에 주목했다.
팽 교수는 마취사고를 의료진 개인의 실수로 귀결시키는 ‘Blame & Shame’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사고의 원인이 된 시스템적 문제를 발견하지 못해 동일한 사고가 반복될 위험을 커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Swiss cheese model과 Fishbone diagram 같은 시스템 기반 사고 모델을 소개했다.
Swiss cheese model은 여러 방어 단계(치즈 조각)에 존재하는 약점(구멍)이 일렬로 정렬될 때 사고가 발생한다는 개념으로, 마취 사고가 단순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조직 정책, 작업 환경, 의사소통 등 다양한 요인의 복합적 결과임을 보여준다.
Fishbone diagram 역시 특정 부작용이나 문제(생선의 머리)를 중심으로 개인 능력, 교육·정책, 시간 압박 등 다양한 원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시각적으로 파악하게 해준다.
팽 교수는 이처럼 비난 없이 문제를 함께 검토하는 Morbidity & Mortality (M&M) rounds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구조적 접근이 향후 마취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고 환자 안전을 개선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수의마취통증의학 20년
안정·안전·체계 넘어 지속가능성까지 고려한 마취로
학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서울대 이인형 교수는 외과 교수로 임용됐다가 소동물 마취를 맡게 됐던 2007년을 회고했다. “2011년 마취통증의학과가 정식으로 만들어지기까지 4년간 이름도 없이 일한 셈”이라며 학회 창립의 감회를 전했다.
이제는 서울대와 경북대에 마취통증의학을 전공한 손원균·장민 교수가 임용됐고, 대형 동물병원을 중심으로 마취전공자에게 마취와 통증관리를 맡기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
전문의 도입 과정에서도 마취는 독자노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 교수는 “아시아수의전문의에서도 마취는 외과와 분리된 과정을 만들려고 한다. 유럽과 미국의 수의마취통증의학전문의와 비슷한 수준으로 구성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개·고양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의 마취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제주대 말동물병원, 한국마사회, 평창산업동물임상교육연수원 등과의 협력도 시사했다.

현대 마취의 100년 역사를 조명한 서울대 손원균 교수는 수의마취가 안정적(stable)이고 안전해야 한다(safe)는 전통적 요구사항을 넘어 체계적(systematic)이며 지속가능해야 한다(sustainable)는 ‘4S’ 과제를 제시했다.
사람의료에서 마취전문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2000명당 1명꼴이었던 마취사고 발생률이 근래 비행기 사고보다도 낮은 40만명 중 1명꼴로 크게 감소했다는 점도 지목했다. 수의 분야에서도 향후 마취통증의학 발전으로 마취사고 감소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마취와 관련된 ‘지속가능성’은 새로운 시각이다. 흡입마취제는 용도를 다한 후 대기중으로 배출되는데, 화학 구조 상 불소(F)를 다수 함유한 흡입마취제 성분은 안정적인 기체로서 온실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는 마취제 선택에 새로운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
온실효과가 상대적으로 심한 흡입마취제인 데스플루란(desflurane)은 유럽에서 속속 금지되고 있다. 동물병원에서도 이소플루란(isoflurane) 대신 세보플루란(sevoflurane)을 도입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세보플루란이 이소플루란 대비 효과가 빠르고 폐환기에 장점이 있는 것에 더해 ‘온실효과가 덜하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수술 등에서 국소마취를 병행하면 더 나은 진통과 더불어 흡입마취 요구량 감소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환자의 안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더 나은 마취법이 된다.

뇌수술하고 최고 중요 항생제는 잘 쓰면서.오피오이드 활용은 주저
급성통증 평가, 통증 관리 중요성 강조
경북대 장민 교수는 ‘변화하는 소동물 통증관리: 약물과 기법의 최신 동향’을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2000년대 들어 세계소동물수의사회(WSAVA), 미국동물병원협회(AAHA)가 제시하는 통증 관리 가이드라인의 발전사를 중심으로 통증 관리의 중요성과 원칙을 조명했다.
장 교수는 아직 국내 수의임상이 통증 관리에 소극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뇌수술도 하고, 매우 중요한 항생제인 카바페넴 계열도 적극적으로 처방하는 반면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 사용은 주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통 평가’의 중요성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원한 환자가 얼마나 아픈지를 체계적, 일상적으로 평가하여 통증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선 수의사가 개에서 급성통증을 평가하는 콜로라도·글래스고 Scale과 고양이의 Grimace Scale을 반드시 숙지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 교수는 “(수술로) 칼을 대면 아프다. 그로 인한 급성통증은 100% 예측된다. 그에 대한 통증 평가와 선제적 진통은 필수”라며 “이미 미국·유럽에서는 당연한 스탠다드로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피오이드와 국소마취,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를 통증 치료의 핵심(cornerstone)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펜타닐을 비롯한 오피오이드를 활용하는 국내 동물병원의 비율을 15%가량으로 추정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활용 필요성을 제기했다. 동물용 진통제 신약에 눈길을 빼앗기기 보다 진통의 기본인 오피오이드 활용부터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형 교수는 “한번 마약류를 활용해 진통 관리를 해보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서 “예전에는 수술 후 깨어나며 울던 동물로 시끄러웠던 준비실과 입원실 모두 조용해진다”고 말했다.
이날 학회장에서 만난 마취통증의학 전공자들도 ‘더 나은 통증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중증 환자에 대한 고난도 전신마취뿐만 아니라 국소마취를 위한 신경차단(nerve block), 사람 수술에서의 ‘페인 버스터(pain buster)’로도 친숙한 ‘Wound infusion catheters’ 등도 시도한다는 것이다.


마취통증의학 교육·표준화 노력
한국수의마취통증의학회는 국내 수의마취 및 통증분야의 임상·연구 발전을 도모하고, 동물에게 안전한 마취 및 통증 관리 표준 확립을 목표로 설립됐다.
이날 학회는 창립을 기념해 참가자들에게 최신 AAHA ‘개와 고양이를 위한 마취 및 모니터링 가이드라인’ 번역본을 제공했다.
아울러 AVA(Association of Veterinary Anaesthetists)와 협력해 국제 기준의 마취 모니터링 기록지를 한글로 번역해 도입했다.
한국수의마취통증의학회 부회장을 맡은 손원균 교수는 “학회가 그간 마취통증의학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수의사들에게 표준화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정식 전문의 제도 정착을 위해 체계적인 전문의 양성 시스템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학회는 마취 전공의를 시작한 지 18년 만에 개최된 것으로, 개인적으로도 매우 감회가 새롭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일선 임상수의사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이인형 회장은 “수의마취 분야의 전문성과 최신 지견을 공유하고, 안전하고 윤리적인 마취·통증 관리 체계 구축을 위해 다양한 학술 및 교육 활동을 수행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가은 기자 vet_g_8113@snu.ac.kr
윤상준 기자 ysj@dailyv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