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말기 반려동물 보호자가 인식하는 `나쁜 죽음` `좋은 죽음`

수의인문사회학회 첫 학술세션..동물 환자 철학적 고찰, 동물복지 교육 개선 제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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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의인문사회학회가 10월 28일 군산새만금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1 대한수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첫 세션을 열었다.

주로 수의과학 연구의 최신 지견을 공유하는 대한수의학회에서 동물 환자의 정의와 동물복지 교육, 반려동물 생애말기의 소유주 경험을 다룬 인문학 세션은 눈길을 끌었다. 학회 첫 날 첫 세션임에도 강의실은 만석이었다.

이날 세션에서 정예찬 박사는 ‘동물 환자’를 철학적으로 고찰했다. 사람 환자와 다른 동물 환자의 특징이 수의사들에게 도덕적 스트레스와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했다.

주설아 연구원은 생애말기 반려동물을 돌보는 보호자들의 의사결정 경험을 소개했다. 보호자들은 동물의 고통을 중요한 의사결정 요소로 삼으면서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달리 인식했다.

수의사도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끼쳤는데, 수의사의 같은 대응방식에도 보호자가 보이는 반응이 상반되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최태규 수의사는 국내 수의과대학에 필요한 동물복지 교육 프레임 워크를 제언했다.

정예찬 박사

사람과 다른 동물의 ‘환자되기’ 수의사에게 윤리적 딜레마

고려대학교 정예찬 박사는 ‘동물 환자되기’를 주제로 동물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소개했다.

사람은 아프면 스스로를 환자로 인식한다. 반면 동물에게 ‘환자’라는 지위는 전적으로 사람에 의해 부여된다.

정예찬 박사는 “건강과 질병의 여부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유무, 동물종, 수의학적 서비스의 성격을 두고 ‘환자’라 부를 수 있는지를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동물에서는 건강·질병도 사람과는 다르게 인식된다.

생명체의 항상성이나 정상적인 생물학적 기능, 웰빙으로서의 건강은 사람과 동물에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반면 축산업에서 가축의 생산성은 사람보다 더 무게를 가진다. 정신적 건강이나 목표 실현 능력으로서의 건강은 동물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동물은 아프지 않아도 ‘환자’가 될 수 있다. 집고양이가 정해진 곳에 소변을 보지 않는다면 ‘아픈 고양이’가 된다. 난소낭종이 생긴 소는 별다른 임상증상을 보이지 않더라도 생식능력이나 우유생산이 감소한다는 측면에서 건강하지 않게 된다.

정예찬 박사는 “반려동물 임상이 발전하면서 현대 수의학은 점차 환자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면서도 “환자 개념이 강화될수록 수의사들에게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물 환자를 사람 환자와 같이 인식하면서도, 금전적인 문제로 치료를 포기하거나 상황에 따라 안락사를 실행하는 등 실제 현장에서 완전히 사람처럼 취급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정예찬 박사는 “동물 환자의 개념은 사람 환자와 동일할 수 없고, 모든 동물을 현실적으로 동등하게 치료할 수도 없다”면서 동물의 건강·질병에 대한 사회역사적, 관계론적 관점을 포함해 ‘동물 환자되기’를 인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람 환자와 다른 동물 환자의 특성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내려야 수의사의 도덕적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주설아 연구원

생애말기 반려동물 보호자가 인식하는 ‘나쁜 죽음’과 ‘좋은 죽음’

내가 죽인 느낌 / 고통을 없애주는 의무의 일환’ 안락사에 대한 인식도 상반돼

서울대 수의인문사회학교실 박사과정 주설아 연구원은 중증질환으로 생애말기(End-of-life)에 이른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자의 의사결정 경험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진행 중인 ‘수의학에서 윤리적 의사결정 지원시스템 구축’ 연구 중 일부다.

생애말기에 이르면 치료(cure)에서 돌봄(care)으로 무게추가 이동한다. 미국동물병원협회(AAHA)는 2016년 ‘동물 호스피스 케어 피라미드’를 제시하면서, 수의사와 보호자가 협력해 생애말기 동물환자의 신체적·사회적·정서적 건강을 모두 관리하여 최적의 삶의 질(QOL)을 달성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주설아 연구원은 10년 이상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동물의 투병이나 죽음을 경험한 적 있는 성인남녀 30명을 대상으로 60~120분간 심층면담을 진행한 후 문서화된 면담내용을 분석했다.

현재 분석이 진행 중인 가운데 이날 세션에서 소개한 일부 결과에 따르면, 보호자들에게 동물의 고통은 의사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났다. 회복불가능한 의학적 상태도 영향을 미쳤다.

안락사에 대한 인식은 상반됐다. ‘내가 죽인, 포기하는’ 느낌에 안락사를 절대 거부하는 보호자도 있는 반면, 일부 보호자는 안락사를 고통을 없애주는 의무의 일환으로 바라봤다.

수술대 위나 찬 곳(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나쁜 죽음’으로, 가족들과 보호자 품에서의 죽음을 ‘좋은 죽음’으로 인식했다.

생애말기의 시간적 제약과 돌봄에 드는 자원도 보호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쳤다. 생애말기의 투병기간은 보호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완충기간으로 작동했다. 너무 짧으면 ‘갑자기 떠났다’는 혼란이, 너무 길어지면 보호자의 어려움이 가중됐다.

(@AAHA Guideline ‘Components of an integrated approach to EOL care’)

수의사 중심에서 환자·고객 중심으로 이동하는 VCPR

일방적 권고보다 정보제공·의견교환 함께 해야

수의사는 생애말기 반려동물 보호자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결정의 책임은 보호자에게 있지만, 보호자는 지식의 한계나 감정적 부분 때문에 수의사의 권위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영향은 부정적으로도 나타났다. 수의사가 부적절하고 비윤리적 단어를 사용하거나, 보호자의 원하는 생애말기 준비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다.

수의사 판단에 더 이상의 침습적인 처치나 검사가 무의미하다고 해서 보호자와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중지하거나, 반대로 다른 옵션이 있었음에도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로 적극적인 치료를 강제하는 등의 형태다.

반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보호자와 의견을 교환하며 돌봄 형태를 결정하는 방식에는 수긍했다.

수의사와 보호자의 소통에 정답이 없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수의사의 대응 방식이 같아도 보호자마다 다르게 인식됐다는 것이다.

가령 여러 위험이나 가능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경우 어떤 보호자는 더 나은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로 받아들이는 반면, 일부 보호자는 더욱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가망이 없다’는 표현에 상처를 입기도 하는 반면, 일부 보호자에게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주설아 연구원은 “’무조건 살아요’ 같은 표현보다 충분한 설명을 기반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형태가 더 안심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보호자는 수의사에게 단순한 감정적 위로나 상담을 기대하지 않는다. 정보와 전문적 평가를 제공하고 의견을 공유하면서 함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태규 수의사

동물복지에 무감각한 한국 수의사? ‘배운 적이 없다’

영국 에딘버러 수의과대학에서 동물복지를 전공한 최태규 수의사는 국내 수의과대학의 동물복지 교육 문제를 지목했다.

최태규 수의사는 “현대 사회가 수의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달라지고 있다. 동물 건강의 전문가, 질병을 예방·치료하는 기술자에서 동물복지를 앞장서서 지키는 사람(OIE, 2012)으로 변해가고 있다”면서도 “국내 수의사집단은 동물복지를 앞장서서 리드하기 보다는 대중의 수준을 따라가는데 급급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국 수의사를 만나면 동물복지에 관심이 없거나 무감각하다는 인상을 받는다”면서 “그들이 나쁘다기 보단 배운 적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상에 공개된 국내 수의과대학 커리큘럼에는 동물복지학, 동물행동학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선택과목에 그치거나 동물복지 전공자가 강의를 담당하지 않는 등 한계가 있다는 것이 최태규 수의사의 지적이다.

이날 최태규 수의사는 유럽, 미국수의사회가 권고하는 동물복지 교육 요소를 소개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수의과대학에 적용할 수 있는 동물복지 교육 구성을 제안했다.

동물복지의 개념부터 동물의 생물학적 요구, 동물복지의 평가지표, 동물복지 개선책 제시, 동물복지 이슈에 대한 전문적 분석과 의사결정·소통 등을 포함한다.

최태규 수의사는 “수의대생, 수의사들을 대상으로 동물복지 역량 자가평가 조사를 실시하고 동물복지 교육 체계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생애말기 반려동물 보호자가 인식하는 `나쁜 죽음` `좋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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