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무의 생명이야기⑥] 동물이라는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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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라는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2011년 구제역 발생으로 인하여 350만 마리에 달하는 돼지와 소들을 살처분 하였다. 또 올 초부터 발생한 AI로 인하여 1,400만 마리에 달하는 닭과 오리들이 살처분 되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살처분 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특히 동물이라는 생명을 다루는 수의사들은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놀랍게도 일반인이나 수의사나 무수히 많은 동물들을 살처분 하는 사태에 대한 그 시각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전염병학적인 논의가 좀 더 깊이 이루어지거나 공중위생학적인 측면에서 살처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좀 더 투철한 정도이다. 혹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생각이 더 강하다.

가축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과 관련된 논의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수천마리의 동물이라는 생명들이다. 아직도 확실히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는 AI를 살펴보아도 AI와 관련된 논의는 무엇 때문에 전파가 되었냐며 철새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철새를 논쟁의 중심에 두는 것도 하나의 프레이밍이다. 논쟁의 틀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사가 그것에 집중되게 만든다.

가축전염병을 비롯하여 축산업과 관련된 분야에서 철저히 간과되고 있는 것은 가축이라는 동물이 생명이라는 부분이다. 그것은 축산업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 가축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은 그 한 부분일 뿐이다. 가령 양계업을 살펴보면 오늘날 양계업은 크게 계란을 생산하는 산란계업와 고기를 생산하는 육계업으로 나뉜다. 이 두 분야는 닭의 품종이 다르다. 양쪽 모두 부화장에서 계란을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면 이 병아리들은 병아리감별사에 의해서 감별되어 수평아리들은 갈려서 다른 동물의 사료가 된다. 산란계 쪽에서는 수평아리는 알을 낳을 수 없으니 필요가 없고, 육계 쪽에서는 수평아리들은 암평아리들에 비해 사료도 많이 먹고 그에 비해 움직임이 많아 살이 덜 찌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사료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해 우리나라 도계장에서 도축되는 닭은 7억 마리 가까이 된다. 물론 이 닭들은 거의가 암탉들이다. 그럼 그만큼에 해당하는 7억에 가까운 수평아리들이 매년 살처분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수평아리들을 우리 인간이 이렇게 다루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 자체가 무척 낯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분들은 사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을 할 것이다. 문제는 사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적은 투자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수평아리라는 생명을 우리가 그렇게 다루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동물이라는 다른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생각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생각은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진 인류의 철학이나 종교와 같은 정신적 유산에 기반 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오늘날 현대 사회는 철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서양의 영향으로 틀지어졌다. 그렇기에 오늘날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생각의 기본 틀을 이해하기 위하여 동물에 대해 철학적 논의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서양의 철학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 회에는 먼저 고대나 중세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동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간략히 살펴본다. 동물에 대한 생각은 현대에 와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논의가 동물복지론과 동물해방론이다. 다음 회에는 이 대략적인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고 또 이들 논의들이 갖고 있는 한계를 아주 간략히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동물에 대한 시각의 변천사

고대철학은 동물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생물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파악하였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이나 동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식물은 동물을 위해 존재한다. ···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가축이 식량이나 기타 용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야생 동물도 그러하다. 즉 야생 동물은 식량이나 다른 기타의 용도, 즉 의복이나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자연은 일정한 목적이나 의도를 위한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1)

또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는 동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야수를 죽이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의 섭리에 의해 동물은 자연의 과정에서 인간이 사용하도록 운명 지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을 죽이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은 동물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부정의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은 노아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목초와 더불어 고기를 주었다.”2)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는 오로지 인간만이 사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믿었다. 반면 동물과 다른 생명체는 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인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3)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는 서양의 철학이 인간중심적인 가치이론을 형성하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칸트도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견해를 강화했다. 그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행위를 할 능력이 있는 자율적인 존재만이 도덕적인 존재이며 다른 모든 생명체는 이러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대상으로부터 배제했다. 그에게 동물과 식물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었다.4)

또 데카르트는 모든 실재는 마음과 육체라는 두 가지 기본 실체유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신의 영역에는 사고, 감각, 의식이 포함되며 육체의 영역에는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이 물리적인 영역은 완전히 기계적이기 때문에, 의식을 결핍한다. 그에게 물리적인 영역에 속하는 동물과 식물은 살아 있긴 하지만 기계, 또는 ‘사고 없는 야수’일 뿐이었다.5) 그래서 데카르트는 동물을 뻐꾸기시계 같은 ‘자동인형’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데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행동을 하는 것은 기계가 고장 났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며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며 동물을 산 채로 해부하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최초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벤담은 권리의 주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폭군의 손아귀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결코 억압당하지 않을 그런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가 검다는 사실로 인해 한 인간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괴롭히는 자의 변덕에 맡겨져도 괜찮을 이유라고는 전혀 없음을 이미 발견하였다. 다리의 수, 피부가 털로 덮였다는 것, 또는 엉치뼈의 끝부분 따위는, 어떤 감각적 존재를 똑같은 운명에 맡겨버릴 근거로서는 똑같이 불충분함을 깨닫는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른다. 이 밖에 밝혀내야 할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과연 무엇인가? 이성의 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인가? 그러나 다 자란 말이나 개는 태어난 지 하루나 한 주일, 또는 심지어 한 달이 된 아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화도 더 잘 나눌 수 있고, 더욱 이성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상이 이와 다르다고 가정할 때, 어떤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 문제는,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도 아니고, ‘말을 할 수 있는가?’도 아니며,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인 것이다.”6)

벤담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진 모든 존재에로 확대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 회에 살펴 볼 피터 싱어에 의해 옹호되어 진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근거로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생각하였고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가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 자체를 거부했다. 따라서 인간 이외의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자연물에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은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파악함으로써 자연계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이런 이유에서 현재의 환경파괴와 관련해 철학자들이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또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은 철학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종교 전통도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7)8) 신부이자 철학자인 에머리히 코레트는 동물과 인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동물은 자신의 본능과 욕구에 상응하는 내용만을 전적으로 포착하며 반응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는 앎이 결여되어 있다. 또 동물의 지체들은 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도의 전문화는 어떤 제한된 삶의 공간에 고정되어 얽매임을 의미한다. 동물은 직접적으로 본능 종속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주위 세계를 파악하며 본능 또는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다른 내용은 동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동물은 주위 환경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 아래에서는 항상 동일한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 이에 비해 인간은 오로지 본능의 충족을 약속하는 것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내용도 인지한다. ···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세계를 형성할 수 있고, 목표를 설정할 수 있으며, 사용할 수 있고 가치를 실현하고 문화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9)

이러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인식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기반으로 하여 오늘날 동물과 자연을 착취하는 철학적, 종교적 뒷받침 역할을 하였다. 역사학자 린 화이트(Lynn White)는 「생태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논문에서 자연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기술적 접근은 유대-기독교적 관점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서양의 기독교가 현재 환경 위기의 근원이라고 주장을 했다.10) 화이트는 창세기의 관점이 인간 중심적이며 인간을 특권적 위치에 놓음으로써 인간과 다른 자연을 구분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파괴까지도 용인하는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화이트는 모든 기독교 신학이 이러한 인간중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해석을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해석은 현재 환경 위기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2편 보러가기

1)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 8장, 1256b, J.R.데자르뎅, 『환경윤리』, 자작나무, 1999, 162쪽, 재인용.

2)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3권 2부, J.R.데자르뎅, 앞의 책, 162쪽, 재인용.

3) 같은 책, 163쪽.

4) 같은 책, 163쪽.

5) 같은 책, 164쪽.

6) 제레미 벤담, 고정식 역,『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나남, 2011, 444쪽.

7) J.R.데자르뎅, 앞의 책, 163쪽.

8) 박창길, 「동물윤리와 한국의 동물보호법 개정」, 『환경철학』, 2005, 34쪽.

9) 에머리히 코레트, 『인간이란 무엇인가』, 안명옥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4, 98-107쪽.

10) J.R.데자르뎅, 앞의 책, 166쪽.

11) J.R.데자르뎅, 앞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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