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필 칼럼] ‘지금인가요’의 물음을 바꾸는 법, 안락사 결정 앞에서

결정 앞과 그 뒤, 수의사가 놓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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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인가요.”

진료실에서 이 문장을 안 들어 본 수의사는 없을 것이다.

오래 봐 온 노령견을 데리고 오시는 분. 갑작스러운 진단을 받고 결정 앞에 서시는 분. 몇 달 고민하다 오신 분. 다른 병원에서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들으신 뒤 우리 병원에서 다시 물으시는 분.

자리마다 상황은 다른데 던져지는 물음은 같다. 지금인가요.”

소견은 드릴 수 있다. 치료를 이어 가도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은 우리 몫이고, 그 말씀을 드리는 것도 우리 일이다.

그런데 소견을 드려도 그 자리에서 결정이 되지는 않는다. “지금이 적절해 보입니다.” 고개를 끄덕이시고 돌아가신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오셔서 물으신다.

“선생님이 그러셔서 했는데, 제가 너무 서두른 건 아니었을까요.” 소견은 그분의 근거가 되지 못한 것이다.

소견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를 먼저 여쭙는 게 어떨까.

“요즘 좋은 날이 일주일에 며칠쯤 되나요?”

이 한 줄이 상담을 바꾼다. 판단해 달라는 질문을, 보신 것을 말씀해 달라는 질문으로 바꾼 것이다.

지금이 그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 주에 음식을 몇 번 먹었는지, 스스로 일어난 날이 며칠인지, 부르면 고개를 드는지는 곁에 있는 분이 안다. 답은 대개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소리 내어 말하기가 무서운 것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소견을 드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소견이 그분 안에서 근거가 되게 하는 것까지다.

진료실에서 다음 다섯 가지를 함께 보자.

첫째, 통증이 다스려지고 있는가. 통증은 둘로 나뉜다. 약으로 잡히는 통증과 잡히지 않는 통증. 후자로 넘어가면 시간은 더 이상 그 아이 편이 아니다. 약이 듣는지 안 듣는지는 우리가 안다. 보호자는 모른다. 그래서 통증부터 여쭙는다.

둘째, 먹고 마시는가. 못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며칠이 지나면 몸이 버티지 못한다.

셋째, 스스로 자세를 바꾸는가.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는 것은 편해서가 아니다. 보호자는 ‘얌전해졌다’로 읽으신다. 그 오해를 그 자리에서 풀어 드려야 한다.

넷째, 좋아하던 것에 반응하는가. 간식 봉지 소리, 산책 가방, 현관문. 평생 반응하던 것에 반응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

다섯째, 나쁜 날이 좋은 날보다 많아졌는가. 이게 가장 중요하다. 하루로 보면 알 수 없다. 일주일로 보면 보인다.

이 다섯 가지는 점수표가 아니다. 몇 개 이상이면 그때라는 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이미 눈으로 보고 계신 것을 우리가 말로 정리해 드리는 것뿐이다.

그래서 적어 두시라고 권한다. 달력에 표시 하나면 된다. 좋았던 날에 동그라미, 힘들었던 날에 가위표. 한 주가 지나면 그 달력이 우리 대신 말해 준다. 매일 보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못 본다. 종이에 적힌 일주일은 다르다.

결정을 대신 내려 달라고 하시는 분도 계신다. “선생님이 정해 주세요”라고. 그 말은 대개 “책임을 나눠 달라”는 뜻이다. 나는 결정을 대신 내려 드리지 않는다. 대신 다섯 가지를 끝까지 함께 본다. 그러면 조금 전까지 정해 달라고 하시던 분이 먼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보내줘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정해 드린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계셨던 말을 입 밖에 내신 것이다.

*   *   *   *

여기까지가 결정 앞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상담에는 뒷자리가 있다. 결정이 끝난 뒤에 보호자가 다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자책을 만난다. 너무 일찍 보낸 것 같다며 자책하시는 분. 너무 늦게 보낸 것 같다며 자책하시는 분. 두 분은 서로 반대되는 것을 후회하고 계신다.

이 사실이 말해 주는 것이 있다. 어느 쪽으로 결정했어도 후회는 남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후회가 없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두 감정이 같은 사람 안에서 나란히 온다. ‘내가 죽인 건가’라는 자책과 ‘이제 아이가 편해졌다’는 안도. 안도했다고 해서 덜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고통을 곁에서 다 본 사람만 그 안도를 느낀다.

이 자책이 왜 그 하루에만 걸리는지, 이유가 있다.

결정은 그날 갑자기 내려진 것이 아니다. 몇 주에 걸쳐 눈으로 보신 것이 쌓이고 쌓여서 마지막에 날짜 하나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그 하루뿐이다. 앞의 몇 주는 지워진다. 그래서 자책이 그 하루에 통째로 걸린다.

그 장면이 자꾸 돌아온다는 말씀도 같은 이유다. 주사기, 손 위의 무게, 조용해지던 순간. 그 장면 하나가 십 년, 십오 년을 다 덮는다. 그건 그 장면이 더 커서가 아니라 가장 최근이라서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앞의 것들이 다시 올라온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지워진 그 몇 주를 다시 보이게 해 드리는 것이다.

상담을 닫을 때 이렇게 권한다. 그날 실제로 무엇을 보고 정하셨는지 한 줄만 적어 두시라고. 며칠을 안 먹었는지, 언제부터 못 일어났는지, 무엇에 반응이 없어졌는지.

나는 그날 ___을 보고 정했다.

‘그냥 내가 정했다’는 자책으로 남는다. ‘나는 그날 ___을 보고 정했다’는 근거로 남는다. 그 차이를 몇 달 뒤에 아시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방에 함께 있었던 우리뿐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셋이다. 결정을 보호자 혼자 하시게 두지 않는 것. 무엇을 보고 계신지 하나씩 같이 짚어 드리는 것. 그리고 그 하루만 기억하시는 분께 그 앞의 여러 날을 다시 꺼내 드리는 것.

“지금인가요.”

이 물음에 소견으로 답하는 것은 우리 일이다. 다만 그 소견이 그분의 근거가 되려면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

“글쎄요. 요즘 좋은 날이 일주일에 며칠쯤 되나요?”

[박근필 칼럼] ‘지금인가요’의 물음을 바꾸는 법, 안락사 결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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