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학용어 표준화..한글화의 양날, ‘침샘’과 ‘배안보개’를 보는 시선

정비 과정에 임상수의계 참여해야..수의대생은 이중고 ‘차라리 영어 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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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6 수의학용어

어려운 한자어 대신 한글을 중점적으로 활용한 의학계의 용어정비 움직임에 맞춰 수의학용어도 변화하고 있다. 2006년 ‘수의학용어집’ 1판이 출판된 이래 10년만에 수의학용어를 재정비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아직은 수의해부학 등 일부 기초분야를 중심으로만 논의가 진행될 뿐 임상계의 관심은 부족한 상황이다. 오히려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며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대한수의학회 수의학용어위원회와 충북대 동물의학연구소는 25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수의학용어 표준화 사업 1차 공청회’를 개최했다. 수의학용어위원장 김대중 충북대 교수를 비롯해 이흥식 전 위원장, 김재홍 대한수의학회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공청회는 용어 정비 사업에 참여했거나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 위주로 구성돼 아직 수의계의 부족한 관심을 여실히 드러냈다.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전문용어 도입’ 의료계 변화에 발 맞춰..한자 모르는 세대 교육상 필요해

‘잘 쓰고 있는 용어를 굳이 왜 바꾸느냐’는 물음에 공청회 참석자들은 수의학용어 정비의 여러 의의를 제시했다.

인의 용어가 한글 위주로 계속 정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의학계에 속한 수의학 용어도 발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것.

게다가 예전과 달리 한자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세대가 수의과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기존 한자어 용어의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점도 있다.

‘각 분야의 전문용어를 일반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준화하여 보급하라’는 우리나라 국어정책의 기조와도 일치한다.

좋은 한글화와 과도한 한글화?..임상수의계 참여 필요해

의료계가 한글을 중심으로 의학용어를 정비함에 따라 수의학용어도 이를 기본으로 하되 수의분야에만 있거나 인의와 차이를 보이는 용어를 중심으로 조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의학용어의 한글화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다.

타액선을 침샘으로, 총지신근을 공통앞발가락펴짐근으로 한글화하면 용어 자체만으로도 대략적인 의미가 이해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반면 사구체를 토리, 요골을 노뼈, 척골을 자뼈로 정비한 사례에서와 같이 국민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순우리말을 적용함으로써 이미 보편화된 한자어에 비해 오히려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복강경(배안보개)이나 복수(뱃물) 등은 일반인에게도 이미 보편화된 용어이니만큼 변경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순우리말 위주로 수의학용어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에 임상수의계가 대응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학계에서 일방적으로 바꾼다고 한들, 수의사들은 자기가 알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리라는 것.

이는 의료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활동 중인 임상의들은 새로 바뀐 의학용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서강문 서울대 교수는 “용어 정비 과정에서 임상계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 임상계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변경된 결과물이 나오게 되면 결국 다수 수의사들이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라며 걱정을 표명했다.

너무 과도한 한글화를 지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정비 과정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때문에 기초분야 위주인 대한수의학회와 함께 한국임상수의학회에서도 용어위원회 등 정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정착에는 세대교채 필요할 것..중간에 낀 학생들은 피해 불가피

결국 새로운 용어의 정착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이 대다수였다. 수의학 교육을 새 용어로 지속하면서 세대가 교체되어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수의과대학 학생이다.

2006년 새 용어가 나왔지만 많은 수의대 교수들조차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 용어를 유지하는 바람에 학생들은 결국 새 용어와 구 용어를 모두 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 수의과대학 학생은 “본과 1학년 해부학은 새 용어로 배웠는데 2학년으로 올라오니 교수님들이 구 용어를 쓰셔서 수업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말 저 말 헷갈리다 보니 차라리 영어로 의사소통한다는 학생도 부지기수였다.

한자어를 그만 쓰고 한글을 사용하자고 했더니 결국 영어를 쓰게 된 모습이다.

수의과대학 안에서부터 충돌을 겪는 수의대생들로서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새 용어를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기 힘든 상황이다.

    

일본어나 외래어의 잔재를 없애고 한글을 활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

하지만 새로운 한글 용어가 정착하려면 구성원 전체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합의의 조건 중 하나는 새 용어가 대부분의 수의사들이 동감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는것이다. 일제의 잔재 노견(路肩)을 ‘길어깨’가 아닌 ‘갓길’로 바꾼 이어령 박사의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새 용어 정착은 수의학용어 표준화 사업을 혼자 이끌어가다시피 하고 있는 김대중 대한수의학회 수의학용어위원장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용어를 사용하게 될 수의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정비 과정에서 의견과 아이디어를 개진함으로써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새 용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김대중 위원장은 “수의계의 각 협회와 학회를 중심으로 용어 표준화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면서 “각 학회와 수의대에 정비 자료를 배포하고 공청회를 여는 등 수의사 의견을 적극 수렴하겠다”며 참여를 당부했다.

    

수의학용어 표준화..한글화의 양날, ‘침샘’과 ‘배안보개’를 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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