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의사가 만드는 임상시험 : 참여와 실행을 위한 실전 가이드

반려동물 임상시험 칼럼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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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 임상시험은 수의학 발전에 있어 점점 더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임상수의사에게는 낯설고 거리감 있는 주제입니다.

지난 기고(바로가기)에서는 임상시험의 필요성과 흐름, 그리고 수의사들의 다양한 인식을 살펴보았다면, 이번 글에서는 보다 실질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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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임상시험은 단순한 약물 사용이 아닌, 과학적 검증과 윤리적 기준을 기반으로 한 임상적 연구활동입니다. 수의사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실무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 임상시험의 시작은 “시험계획서(Protocol)”의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시험계획서는 투약 방식, 검사 시점, 병용약물 제한, 이상반응 대응 등 모든 절차가 구조적으로 정리된 문서입니다. 이를 제대로 숙지하지 않으면 시험 전체의 흐름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특히 병용약물은 자칫하면 시험계획서 불일치(일탈)로 처리될 수 있으므로, 선정 및 제외 기준과 투약 중지 기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자주 발생하는 계획서 일탈 예시 (지연된 방문)

“예를 들어, 일반 진료에서는 며칠 늦게 방문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임상시험에서는 정해진 기간을 벗어나면 해당 자료가 분석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약물 반응이나 증상의 변화는 관찰 시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보호자 설명과 동의서 작성입니다. 임상시험은 보호자의 자율적 동의를 전제로 하며, 동의는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습니다. 시험 중 발생할 수 있는 이상반응에 대한 책임은 수의사가 아닌 시험 의뢰자(IND holder: 신약후보물질을 규제기관에 제출한 주체)에게 있으며, 대부분 임상시험 보험을 통해 보장됩니다.

사실상 반려동물 임상시험은 사람 임상시험보다 더 높은 안전성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내에서 승인된 정식 임상시험은 농림축산검역본부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시험 전에 비글 등의 같은 종에서 일반적으로 3~5배 이상의 용량으로 독성시험을 완료한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기에, 예상치 못한 반응 가능성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 임상처럼, 반려동물 임상도 이번에 나온 FDA 가이드라인 초안(GFI #282)에서 보호자가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어야 하고, 시험에 대한 설명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 임상시험 데이터를 기록하는 방식인 전자증례기록지(eCRF: electronic Case Report Form)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는 인체 임상시험에서 이미 표준처럼 사용되며, 수의학 임상시험에서도 점차 도입되고 있습니다.

시험계획서의 흐름에 따라 데이터를 구조화하여 입력하도록 되어 있어, 입력자와 시점의 추적이 가능하고, 데이터 일관성과 신뢰도 측면에서 장점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전자차트와 비슷하지만, 구조화된 정해진 틀에 맞춰 기록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전자증례기록지(eCRF) 예시

”전자차트를 사용해본 수의사라면 작성이 어렵지 않으며, 임상시험 계획서에 맞춰 구조화된 형태의 차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쯤에서 많은 수의사들이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걸 내가 다 해야 한다면, 나는 못하겠는데…”

하지만 실제로 임상시험은 우리가 익숙한 진료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만성신부전 환자의 경우, 정기적으로 혈액검사를 하며 경과를 확인합니다. 피부 질환 환자에게는 일정 주기마다 상태를 재확인하며 치료 방침을 조정합니다. 임상시험 역시 이와 비슷한 흐름으로 설계됩니다.

보호자 설명과 동의서 작성도 낯선 절차가 아닙니다. 수술이나 치료 전에 보호자에게 질병, 치료 효과, 예상 부작용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것은 이미 수의사가 매일 하고 있는 일입니다.

전자 증례기록지도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차트와 유사하며, 방문일, 신체검사 결과, 경과, 수의사 소견 등을 구조화하여 기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임상시험은 우리가 평소에 하는 진료를 보다 체계화한 “연구 행위”입니다. 말만 다를 뿐, 본질은 익숙한 작업입니다.

   

임상시험은 단순히 신약 개발을 위한 절차가 아닙니다. 실제로 시험에 참여한 수의사들은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성장과 이득을 경험합니다.

첫째, 최신 치료 트렌드와 접근 방식의 체득입니다. 임상시험은 항상 최신 치료법과 표준화된 접근 방식을 반영하여 설계되므로, 참여 수의사는 자연스럽게 가장 앞선 임상 기준과 정량적 평가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둘째, 좋은 정보를 선별하는 안목이 생깁니다. 요즘은 정보가 넘쳐나고, 제약사나 콘텐츠는 저마다 “자신들의 약이 최고”라고 주장합니다. 이럴 때 수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를 걸러내는 눈입니다. 임상시험을 해본 수의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 이 논문은 무작위배정(Randomization)으로 설계되었는가?

• 블라인드(Blind) 구조였는가?

• 대조군(Control group)이 있었는가?

특히 수의학 임상에서는 보호자의 주관적인 관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Caregiver placebo effect(보호자 플라시보 효과)”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보호자가 치료 효과를 기대한 나머지 실제보다 개선된 것으로 인식하고 보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잘 설계된 임상시험이 필요하며, 이를 경험한 수의사는 데이터의 신뢰성을 보는 안목도 함께 키워갑니다.

“Muñana et al. (2010)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치료를 받지 않은 위약군의 79%에서 보호자가 ‘증상이 호전됐다’고 보고했으며, 29%는 치료 반응군으로 분류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진료 현장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보호자의 평가조차, 기대감 하나만으로, 플라시보 효과로 크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셋째, 실질적인 비용 지원 혜택입니다. 임상시험에 따라 검사나 치료에 드는 비용이 전액 또는 일부 지원되며, 참여 동물 1마리당 일정 수준의 연구비가 제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부담을 덜며 치료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동물병원은 학술적 참여 외에도 현실적인 자원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경쟁력 있는 수의사로의 성장입니다. 임상시험에 참여한 수의사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확실히 달라집니다.

최신 치료 기준에 익숙해지고, 논문을 구조적으로 읽을 수 있으며, 보호자에게 신뢰감 있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는 단순한 임상시험 참여를 넘어, 임상과 연구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수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임상시험의 성공 여부는 동물병원의 규모나 장비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 지원은 제한적이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참여하는 1인 동물병원의 원장님

• 환자 중심의 태도를 가진 과장급 수의사

• 임상시험의 목적을 이해하고 일상 진료처럼 성실히 임하는 수의사

이러한 수의사들이 참여한 임상시험은 더 정확하고, 더 안정적입니다. 반면, 아무리 큰 동물병원이라도 담당 수의사가 이를 ‘야근비 없는 부가 업무’로 인식하면 시험은 흐트러지고 데이터 품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임상시험은 환자 모집이 대개 상급 종합병원에서 이루어지지만, 반려동물 임상시험은 로컬 동물병원이 중심적으로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는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보호자 접근성과 현실적인 환자 모집이라는 측면에서, 로컬 동물병원이 임상시험의 핵심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수의사들도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부담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보호자가 임상시험 참여를 결정할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요소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담당 수의사의 추천

2. 시험 주관 기관에 대한 신뢰

3. 본인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보호자는 수의사의 안내와 판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이는 Gruen et al. (2014)의 연구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보호자들은 수의사 추천, 기관에 대한 신뢰, 그리고 반려동물의 건강에 대한 직접적인 혜택을 임상시험 참여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꼽았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설명, 무료 검사나 일부 금전적 지원과 같은 경제적 혜택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시험마다 다르지만, 보통 1~3회 방문에 대해 혈액검사, 영상진단 등의 비용이 무료이거나 일부 보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임상시험에서는 CRC(연구간호사), CRA(임상시험 모니터요원), 일반 간호사, 행정직원, 데이터 매니저 등 다양한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 시험을 분담합니다. 반면 수의사는 설명, 서류 작성, 투약, 기록까지 대부분의 절차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임상시험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의학, 특히 반려동물 의학에서는 “분산형 임상시험(DCT, Decentralized Clinical Trial)”이 중요한 트렌드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분산형 임상시험은 보호자가 동물병원 외부에서도 설문에 응답하거나 전자동의서를 통해 원격으로 참여하는 등, 일부 절차를 분산시키는 구조를 말합니다. 수의사는 진료와 평가에 집중하고, 기록과 모니터링은 중앙 시스템이 자동으로 처리합니다.

사람 임상시험에서는 COVID-19 팬데믹을 계기로 분산형 임상시험 도입이 가속화되었으며, 2024년 미국 FDA가 최종 가이드라인을 통해 그 중요성과 적용 요건을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분산형 임상시험이 단순한 임시 수단이 아닌, 신뢰 가능한 임상시험 방식으로 제도권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반려동물 임상시험에서도 분산형 임상시험은 수의사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 보호자의 피로도를 낮추며, 데이터 품질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임상시험은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설계부터 기록, 설명까지 수의사와 동물 환자의 미래를 바꾸는 과정입니다. 수의사가 이를 진료의 연장선에 있는 연구 행위로 인식하고 책임감 있게 참여할 때, 임상시험은 수의학 발전을 이끄는 핵심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임상시험인 EPIC study는 무증상이지만 심비대가 동반된 승모판 질환(MMVD) 환견을 대상으로 피모벤단(Pimobendan)의 예방적 효과를 검증한 글로벌 다기관 임상시험입니다. 전 세계 36개 동물병원이 참여하였으며 그중 다수가 로컬 동물병원이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이후 가이드라인을 변화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현장의 수의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주도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EPIC study처럼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임상시험 결과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서 어떻게 동물 임상시험이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나라에서도 동물 임상시험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앞으로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기고] 수의사가 만드는 임상시험 : 참여와 실행을 위한 실전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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