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무의 생명이야기⑧]생명인 동물에 대한 최소의 예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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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구제역으로 350여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됐다. 또 올해 초에 발생한 조류독감으로 인하여 14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생매장 되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살처분 된 소나 돼지 그리고 닭과 오리들은 모두 고통을 느끼는 생명들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동물들이 살처분 됐는데 이러한 살처분을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특히 동물을 다루고 있는 수의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놀랍게도 이렇게 많은 생명이 살처분 된 사태를 대하면서 많은 수의사들은 전염병의 확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버린다.

김동광이 그의 논문 「우리에게 구제역은 무엇인가」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가축전염병에 의한 살처분은 단지 질병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구제역이 초기에 발생한 영국에서 당시 구제역은 우리의 감기와 같이 일시적으로 소들이 앓고 지나가는 병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한 것을 국가적인 질병으로 플레이밍화 하면서 살처분하게 되었다.

또 조류독감 또한 치사율이나 전염성이 높은 질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보들은 배타적으로 차단한 상태에서 조류독감은 철새에 의해서 전염되었다는 발표만을 반복하였다. 조류독감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은 묻어둔 채로 말이다.

     

가축이라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가축전염병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으니 다른 예를 들어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7억 마리 가량의 닭들이 도살되고 있다. 이 닭들은 모두 암탉들이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하고 난 후 산란계용 닭은 수평아리들은 알을 낳지 못하기에, 또 육계용 닭의 수평아리들은 사료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병아리 감별사에 의해서 감별되어 갈려져서 다른 동물의 사료가 된다. 그 수는 1년에 도살되는 암탉들의 수와 비슷한 7억 마리 가량이다.

사료효율을 높인다는 다시 말해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7억 마리의 어린 생명이 태어나자마자 갈려진다. 이 어린 수평아리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류는 오랜 동안 동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또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인류는 동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왔을까? 또 오늘날 인류는 어떤 식으로 동물을 대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미국 서던메서디스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잔 카제즈는 『동물에 대한 예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전의 동물학 고전들을 종합적으로 비판·발전시켜 21세기 동물윤리학계의 선구적 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은 생명이다. 또 동물들도 생명이다. 그런 생명으로써의 인간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생명이 생명을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죽이고 이용하는 것은 합당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길가의 벌레조차도 되도록 밟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으로써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게 갖는 이러한 연민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다른 생명을 죽일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 시대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오래된 신화를 보면 인류가 동물을 죽일 때 얼마나 불편함을 느꼈는지 알 수가 있다.

     

일본 북부 섬의 원주민 아이누 족은 산속에서 흑곰의 새끼를 데려다 2년 정도 키운다. 어린 새끼 곰은 원주민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면 ‘곰 보내기’라는 축제를 통하여 곰을 잡아먹는다. 아이누 족은 이런 의식을 통해 곰의 영혼을 산속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로 보내주었기 때문에 곰은 산속의 자기 가족에게 돌아가 산 아래의 인간을 칭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식은 곰에 대한 존중과 곰을 죽이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불완전하거나 헛된 것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면, 자연은 사람을 위해 모든 동물을 만들었다고 추론해야 한다.”고 했다.

르네 데카르트의 “동물은 영혼이 없는 자동인형”라고 했다. 그는 동물이 고통 받을 때 소리를 지르는 것은 시계의 자동인형이 춤을 추는 것과 같이 기계적인 반응일 뿐 영혼이 없으니 고통을 모르고 그러므로 동물을 이용하는 일에 일말의 가책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가 인간과 동물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 반면 다윈은 지구의 다양한 종은 진화의 차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칸트는 인간이 동물에 대해서는 윤리적 의무는 없다고 했지만 동물을 잔인하게 대한다면 인간 역시 잔인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공리주의자였던 제레미 벤담은 타자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한 우리에겐 그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동물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동물을 이익의 주체로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학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동물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끝없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강조한다. 특히 인간과 동물은 이성과 의식에 의해서 확연하게 구분된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피터 해리슨은 신은 선한 것 이외의 것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선하다고 볼 수 없는 동물의 고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철학자 스티븐 스티치는 머릿속 사고를 내용 문장으로 변환할 수 있어야 ‘사고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지 못하면 사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용 문장을 만들지 못하는 동물은 사고를 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은 인간만큼의 도덕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동물을 인간의 도덕적 공동체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비교 심리학자 고든 갤럽은 동물을 대상으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거울시험을 했다. 동물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자기로 인식하는지를 보는 것인데 그것은 나와 타를 구분하며 또 자기 이해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험결과는 많은 침팬지는 실험에 통과했지만 대부분의 원숭이들은 실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크 하우저는 이런 거울실험에 대하여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거울 속 동물의 눈을 응시해야 하는데 많은 원숭이들은 상대의 눈을 응시하는 것은 적대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동물은 의식이 부족하다거나 이성이 부족하다는 개념, 동물이 자신의 죽음을 인간에게 허락했다거나 신이 동물을 인간의 음식으로 주었다는 개념 등은 모두 ‘종차별 이데올로기’의 위장일 뿐이다.

싱어는 다른 종에 대한 편견과 오만이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종차별주의는 작동하여 동물을 업신여기고 공정치 못하게 대하며 상처 주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인간은 동물은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라고 간주하며 쉽게 음식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에 대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아이작 싱어는 그의 단편 <편지 쓰는 사람>에서 ‘생명들에게 모든 인간은 나치다. 동물들에게 이곳은 영원한 나치 수용소다.’라고 이야기했다.

또 작가 존 맥스 웰 쿠체는 그의 소설 『동물의 생명』에서 우리가 현대의 산업화된 동물 농장에 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일반적인 독일인들이 독일에 산재한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우리는 동물과의 관계에서 불편한 부분을 접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잔 카제즈는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과는 다르게 동물과 인간은 완전히 평등한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스스로 동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완전히 평등하며 따라서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평등주의를 잔 카제즈는 경계한다.

지구상의 다양한 생명 종은 저 마다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동물을 도와야 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먹어야 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과일이나 채소, 버섯, 물고기, 닭, 돼지 등등 많은 종류가 있다. 거기에 식도락적인 차원에서 먹는 것까지 확장하면 곰발바닥이나 상어지느러미 등 먹을거리는 무한대로 늘어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동물을 먹는다.

또 이러한 경향은 공장식 축산을 통하여 양산된 가축들로 인하여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동물들을 먹으면서 우리는 때로 불편한 도덕적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이런 방식으로 다른 동물을 다루고 잡아먹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동물을 잡아먹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약육강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또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지만 살 수 있는데 그것에 어떤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로 생명인 우리가 생명인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에는 아무런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럼 입장을 바꿔서 사자나 곰 또는 상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문제가 있다면 어떤 기준으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반론을 제기하는 기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이런 반론의 근거가 단지 인간과 동물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면 그는 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인간의 육식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윤리적 행위의 첫 번째 기준점은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행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면 타인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나의 생명이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받고 싶다면 먼저 자기 자신도 타인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이 타인의 범주는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모든 생명 또한 소중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은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생명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생명을 존중한다면 그 생명을 잡아먹을 수 없다. 말로는 존중한다고 하고 행위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동물을 존중하느라고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굶어 죽는다. 여기에서 윤리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하여 잔 카제즈는 원시시대에 동굴에 살던 동굴인을 예로 든다. 동굴인은 창으로 동물을 잡아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 동물을 존중하여 동물을 죽이지 않으면 가족들이 굶어 죽는다. 이것은 가족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럼 동굴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제즈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두 가지 근거에 의해서 동굴인은 동물을 잡아서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1)자신과 가족에 대한 존중이 동굴인에게 소를 죽이도록 종용한다. 만약 동굴인과 그의 가족이 동물을 먹지 않았더라면 결국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죽음을 피하고 싶은 열망은 단순한 열망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밀접히 연관된 열망이다. 그리고 (2)동물에 대한 존중은 동굴인에게 잠시 창을 내려놓고 고민하게 만들지만 그가 동물을 가족보다 상대적으로 덜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동굴인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정당하다.

     

이 근거는 다른 경우에도 적용되어질 수 있다. 인디언이 들소를 잡아먹는 것은 정당한가? 에스키모인이 고래사냥을 하는 것은 정당한가? 그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 동물을 잡아먹어야 한다면 그런 행위들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육식은 정당한 것일까? 여기에서 대답은 달라진다.

미국에서는 한 해에 95억 마리의 동물이 식용으로 도살된다. 이 엄청난 생명이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도살되는 것은 정당할까? 이 엄청난 수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도살된다는 변명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쇠고기 1파운드를 만드는 데에는 식물성 단백질 21파운드가 필요하고, 돼지고기 1파운드를 생성하는 데는 식물성 단백질 8파운드가 필요하다. UN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 <가축의 긴 그림자>에 의하면 지구 표면의 30퍼센트가 목초지와 사료 경작지로 사용되며, 전체 농지 중 70퍼센트가 가축을 키우고 유지하는데 쓰이고 있다.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재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작지에 인간이 먹을 곡물을 키우는 경우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곡물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은 곡물을 두고 가축이나 바이오연료 생산업자들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곡물가격이 상승되어 기아가 더 심해지고 있다. 가난한 나라는 축산 때문에 곡물을 구하기 어려워서 기아를 겪는 반면 부유한 나라에서는 과도한 육식으로 인하여 비만과 고혈압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도한 육식은 인류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또 과도한 축산을 위해 열대림을 파괴하여 경작지를 조성하고 가축들이 내뿜는 메탄가스는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UN보고서에 따르면 가축으로부터 발생한 가스가 온실가스의 18퍼센트를 차지하는데 이는 전체 차량에서 발생한 가스보다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또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동물을 이용하고 있다. 그 중에 한부분이 동물실험이다. 미국에서는 한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실험동물이 사용된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실험동물이 사용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얼마만큼의 수가 사용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휴메인 소사이어티는 한 해에 1000만에서 2000만 마리의 동물이 실험실에서 약품과 제품 시험에 이용된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것은 실험동물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이들이 극비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을 홍보하는 책자나 웹사이트의 설명문을 보면 동물실험이 치료법, 약물, 백신, 수술법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에게 매우 큰 이익을 주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왜 동물실험에 사용되는 동물의 수는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동물실험에 사용되고 죽임을 당하는 동물에 대해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동물을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동물실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유익할 뿐 대상이 되는 동물의 이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고통을 인간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강제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카제즈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위의 동굴인의 경우와 같은 근거로 판단을 한다.

1952년 미국에서는 5만 7000건의 소아마비 발병 사례가 보고되었다. 환자 중 3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2만 1000명 이상은 후유증으로 몸의 군데군데가 마비되었다. 1955년 조너스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여 99퍼센트까지 바이러스 감염을 감소시켰다. 그 개발과정에서 소크 박사는 마카크 원숭이와 붉은털 원숭이 1만 7000 마리가 바이러스 표본 분류를 위해 사용되었고 전 과정을 거쳐 어림잡아 10만 마리의 원숭이들이 죽었다.

이 과정에 대하여 소크 박사는 “지하의 죄 없는 원숭이들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것이, 죄 없는 아이들을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제로섬 게임이자 바이러스 게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개발과정에서 많은 수의 동물이 죽었지만, 그 실험은 많은 사람을 살렸다. 소크 박사에게 동물 실험은 필요악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소크에게는 소아마비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크 박사의 동물실험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오븐 세정제나 식기 세정제 등 이미 알고 있는 약품의 독성을 다시 입증하기 위하여 토끼의 눈에 약품을 넣는 실험이나 섬유 보호제의 발암성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이 오랜 기간 마시게 되는 양 이상의 섬유 보호제를 생쥐에게 먹이는 실험을 하기도 한다. 또 고압전기에 감전 되었을 때 뇌나 신경조직의 변화상이나 다양한 통증유발 요인에 대한 동물들의 행동학적 반응시험 또는 진공상태나 고압상태에서 동물이 어떻게 죽어가는지에 대한 실험 등 많은 실험이 있다.

이런 실험이 인간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까?

버나드 롤린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수의윤리학 교수는 동물실험을 할 때 동물의 희생과 인간의 이익 간에 서로 균형이 맞는지 계산하여 판단을 한 후에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많은 동물실험자들은 그러한 계산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동물이라는 생명은 그저 ‘동물에 불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많은 나라에서 동물실험에 대한 허가기준을 높아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동물 실험 연구를 허가하기 전에 내무부 장관이 그 정당성을 평가한다. 1986년, 영국에서는 “장관은 인간이 얻게 될지 모를 이익 대신에 관련된 동물이 겪게 될 역효과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위의 축산동물이나 실험동물에서 다룬 것처럼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정당하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정당화되지 않는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대략 15억 마리의 소와 들소, 17억 5000만 마리의 양과 염소, 20억 마리의 돼지, 240억 마리의 닭이 사육된다. 이 가축들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도한 육식은 인간의 건강까지도 해친다. 건강한 삶을 원한다면 채식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채식에 대하여 영양학적인 우려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국 농무부에서도 “채식주의 식사는 권장 영양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과도한 육식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종의 다양성을 파괴한다.

지구상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이 사는데 이를 종의 다양성이라고 한다. 지구상에 생물 종이 다양한 이유는 다양한 종으로 이루어진 생물 군집이 환경에 더 강하고, 다양한 종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으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도 더 잘 견디며 더 큰 안정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실험동물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반드시 필요한 실험이 아니며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개발되고 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동물에 대한 행위는 대부분 불필요한 살육이다. 인간이 저지른 중요한 잘못은 생명을 빼앗거나 고통을 줄 만큼 가치 있지 않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동물과 맺고 있는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동물에게 존중과 연민의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심으로 존중과 연민을 갖게 된다면 적어도 동물의 이용을 당연시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을 죽이고 먹는 일은 동물을 존중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동물을 존중하는 행위의 첫 시작은 채식이다. 당장 육식을 멈출 수 없다면 조금씩 줄여나가고 또 고통을 당하지 않은 복지형 축산으로 키워진 가축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이다.

동물을 존중한다면 동물들이 그들 나름의 독자적 방식으로 삶을 살도록 놔두는 것이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카제즈는 이야기한다. 내가 생명으로써 존중을 받고자 한다면 다른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곧 나를 존중하는 일이다.

140922 박종무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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