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DF 학점 없이 PASS만 하면 되는 수의과대학 교과목이 있다?

건국대 수의해부학 교실의 성과바탕 교육 전환 실험 '눈길'..학점 없는 절대평가로 PASS/NON-PASS

등록 : 2020.05.28 15:48:03   수정 : 2020.05.28 15:48:44 윤상준 기자 ysj@dailyvet.co.kr

학생들에게 반드시 거둬야 할 학습성과를 제시하고, 해당 역량을 취득했는지 여부만 가리는 ‘절대평가’ 실험이 수의과대학에서도 시작됐다. 아직 1학점짜리 과목이지만, 2014년 연세대 의과대학의 전면 절대평가 도입처럼 큰 파급력으로 발전할 지 주목된다.

그 주인공은 남상섭 교수가 지도하는 건국대학교 수의과대학의 ‘수의해부학실습’ 과목이다.

수의해부학실습은 지난 학기부터 ABCDF 학점의 상대평가에서 벗어나, 절대평가로 PASS와 NON-PASS만 구분하는 방식(PNP, Pass or Non-Pass)으로 전환됐다.

27일 수의해부학실습 중간고사를 치르기 위해 모인
건국대 수의대 본과1학년생들


성과 중심 교육에는 절대평가가 더 적합’

실습시험·출결·동료평가서 일정 기준 만족하면 ‘PASS’

건국대 수의대는 예과2학년 2학기부터 본과1학년 1학기까지 수의해부학과 수의해부학실습을 전공필수과목으로 다룬다. 이중 절대평가로 전환된 것은 수의해부학실습 과목으로, 현재 과목을 수강중인 18학번부터 처음으로 적용됐다.

남상섭 교수는 “수의학의 특성상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보다 많이 아는지 보다, 학생 개개인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며 절대평가 적용 취지를 설명했다.

남 교수는 한국수의과대학협회와 수의교육학회의 성과바탕 수의학교육 개선 준비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교수가) 무엇을 가르쳤나’보다 ‘(학생이) 무엇을 할 수 있나’에 초점을 맞추는 성과바탕 교육을 실제 현장에 적용해본 셈이다.

남 교수는 “사실 수의해부학실습을 포함한 전공필수과목은 상대평가가 의무화되어 있지만, 사범대 등 타 대학에서는 실습과목에 PNP방식이 적용된 사례가 있어 이를 기반으로 대학을 설득했다”며 “해부 실습은 조원들의 협동으로 진행되고 학생들이 매번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데, 개별시험으로 ABCD를 나누는 것은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고 지목했다.

PNP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학생들은 ▲실습시험(중간&기말) 성적 ▲출결 ▲실습태도에 대한 동료평가 등에서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수의해부학실습 과목을 ‘PASS’하게 된다.

성적표에도 별도의 학점 없이 ‘P’로 표기되며, 평점 계산에서는 제외된다.

실습시험에는 해부학적 구조를 3차원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통합 문항도 출제된다.
학생들이 장갑을 끼고 장기를 카데바에 위치시키는 모습을
감독관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평가하는 방식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미리 알려주고 그 안에서 술기 시험

간, 위, 장뭉치를 카데바에 배치해 보세요’ 통합적 역량 평가

실습과 평가의 진행방법을 학생들의 성과(역량)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도 특징이다.

학생들에게는 해부실습 과정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성과가 먼저 제시된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MUST KNOW)과 알면 좋은 것(GOOD TO KNOW)으로 중요도를 구분한다.

시험이 임박하면 그 중에서도 추려진 핵심 평가항목이 제공되며, 시험은 그 범위 안에서 출제된다.

가령 ▲적출된 위에서 들문, 날문, 큰굽이, 작은굽이, 위바닥을 찾고 사체에 원위치 시킬 수 있다 ▲적출된 장뭉치에서 빈창자 돌창자, 막창자, 잘록창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등이 이번 중간고사 핵심 평가항목으로 제시됐다.

학생들은 먼저 제시된 평가항목(학습성과)에 실습의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어디서 출제될 지 모르는 채 이것저것 공부하기 보다, 중요한 내용부터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된다. 학점경쟁에서 벗어난 만큼 상호협력적인 환경도 조성된다.

실습시험의 방식도 눈길을 끈다. 이른바 ‘땡시’로 불리는 시간제한시험의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학생들이 뼈표본을 맞추고 설명하는 오랄 테스트나 적출된 장기표본을 배치하는 등 복합적인 역량이 필요한 문제가 출제된다.

27일 진행된 수의해부학실습 중간고사에서는 위, 간, 장뭉치가 분리되어 있는 카데바를 제공하고, 이들 적출장기를 카데바의 복강에 원위치 시키는 문제가 출제됐다.

간엽의 좌우를 구분하고, 위의 들문·날문을 구분하며, 위·간·십이지장·이자·지라 등의 상대적 위치를 3차원적인 구조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문항이다.

이날 시험을 치른 A학생(본1)은 “시험 범위를 포함한 중요 평가항목이 사전에 제공되고, 이들 항목이 추후 임상에서도 중요한 부분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위 문제에서 평가하는 3차원적인 구조 파악 역량은 복강장기의 수술이나 영상진단 등 임상과목을 배우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기말 시험지와 함께 제출하는 동료평가지.
동료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아도 PASS할 수 없다보니, 실습태도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준다.


PASS/NON-PASS
여도 학습량 줄지 않아..’오히려 공부는 더 한다’

학점경쟁 없어 협력적 분위기..동료평가로 불성실한 ‘프리라이더’ 배제

학생들은 성과중심의 실습시험과 절대평가에 만족감과 어려움을 함께 드러냈다.

27일 실습시험을 치른 직후 만난 학생들은 “PASS/NON-PASS 체계라고 해서 학습량이 절대 줄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핵심 학습성과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보니 PASS 조건으로 고득점이 요구되고, NON-PASS 가능성의 압박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평가에서는 F만 아니면 나쁜 학점에도 개의치 않는 성향의 학생들도 ‘PASS는 받아야 한다’며 실습공부는 하게 된다는 점도 덧붙였다.

복수의 학생들은 해부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몇 시간씩 예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습 없이는 실습을 따라가기 어렵고, 못 따라가면 실습시험을 준비할 때 너무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NON-PASS 가능성에 압박을 받다 보니 ‘난이도 조절’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절대평가가 도입된 첫 학기 중간고사가 무더기 재시험으로 이어지며 학생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이후로는 난이도가 안정되면서 만족도도 높아졌다.

‘힘들지만 수의과대학에 다닌다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B학생(본1)은 “시험의 난이도 조절만 잘 된다면 현재의 절대평가가 더 좋다”며 “공부한만큼 남는 것도 있고, 학점 경쟁이 없다 보니 학우들끼리 협력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학생들이 서로의 실습태도를 평가하는 ‘동료평가’도 도움을 준다. 불성실한 실습태도로 동료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으면 PASS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료평가는 수의해부학 기말고사(이론시험)에서 학생 각자가 소속 조원들을 평가하는 ‘동료평가표’를 함께 제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기본지식, 실습실 안전, 실습태도, 의사소통능력 등 4항목 중 3항목 이상이 조원 과반수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면 NON-PASS 요건에 해당된다.

남상섭 교수는 “각 실습마다 술자와 보조, 가이드로 역할을 분담하는데, 각 조가 자체적으로 운영토록 하다 보니 무임승차하는 조원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며 “비밀평가 형식으로 동료평가를 운영하다 보니 실습태도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성과바탕 교육에는 절대평가가 더 적합

연세대 의대, 2014년 전과목 절대평가로 전환..2018년 국시 합격률 98.6%

비단 수의과대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이 전공과목에는 상대평가를 의무화하고 있다. 절대평가로 인한 학점 인플레이션이나 공정성 문제를 감안한 것이다. 남보다 더 노력해 좋은 학점을 받고자 하는 자세는 학업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수의학교육이 나아가야 할 ‘성과바탕 교육’에는 절대평가가 더 적합하다. ‘누가 더 잘하나’보다는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성과를 학생 모두가 달성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의사 국가시험 또한 상위 몇%를 뽑는 것이 아니라 일정 점수를 넘으면 통과하는 방식이라는 점이 ‘수의학’ 교육의 평가에 무엇이 더 적합한지를 방증한다.

의학교육에서는 절대평가로의 전환이 상대적으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연세대 의과대학은 2014년부터 모든 교과목에 상대평가제를 전면 폐지하고 HONOR/PASS/NON-PASS로 구분하는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 상위 5%에게 부여하는 HONOR 단계를 포함한 PNP 방식이다.

이 같은 전환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14년 처음으로 PNP방식이 적용된 당시 본과1학년들은 2018년 치른 국가시험 98.6%의 높은 합격률을 기록했다.

연대에 이어 2016년 인제대 의대가 절대평가제를 도입했고, 성균관대 의대도 2022년 도입을 앞두고 있다.

남상섭 교수는 “할 수만 있다면 수의해부학(이론과목)도 절대평가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부학 이론수업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MUST KNOW)과 알면 좋은 것(GOOD TO KNOW)을 구분하는 등 일부 조정했지만 상대평가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공필수과목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려면 일일이 대학을 설득해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타 수의대 과목이 모두 상대평가인 상황에서 현실성도 높지 않다.

남상섭 교수는 “수의과대학에서는 우선 실습과목을 중심으로 PNP 방식의 절대평가제 전환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