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와 업체,갑·을 관계 아닌 상생관계 구축 필요

늘어나는 학회·세미나로 업체 부담 점차 증가..관계 때문에 거절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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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이 저물고 2015년 새해가 다가온다. 2014년에는 여러가지 큰 사건들이 많았으며, 특히 12월 한 달은 ‘땅콩 회항’ 사건이 전국을 휩쓸었다.

땅콩 회항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바로 ‘재벌의 되물림’과 ‘갑을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많은 기관·단체들이 “우리도 어떤 면에서 조현아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 그렇다면 땅콩 회항 사건이 수의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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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들은 “소규모의 수의사 학술 행사가 늘어나며 업체의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늘어나는 학회·세미나·교육…허리 휘는 관련 업체

동물병원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수의사를 ‘갑’이라고 생각한다.

9년간 반려동물 산업계에 종사하며 이 분야 마당발로 소문난 관계자 A씨는 “우리는 수의사를 슈퍼 갑이라고 부른다”며 “우리 같은 업체는 수의사들의 입김에 의해서 이미지가 좌지우지되고, 수의사들과의 관계를 좋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2~3년 사이에 수 많은 학회, 세미나, 교육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이에 따른 후원 요청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수의사들과의 관계 때문에 후원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A씨에 따르면, 몇 년 전과 비교했을 때 대형 학회 뿐만 아니라 연구회나 분회 수준의 작은 모임들이 많이 늘어났고, 이런 곳에서도 업체에 광고나 후원을 요구한다.

A씨는 또한 “작은 금액을 후원하거나 제품 샘플을 보내는 정도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부스 참여를 부탁할 경우에는 큰 부담이 된다”며 “대부분의 행사가 주말에 열리는데, 부스로 참여하게 되면 일정 금액의 부스 비용은 물론, 주말에 직원들이 쉬지 못하고 나와야 하고 나눠줄 제품을 준비해야 한다. 업체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부담일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즉, 부스 참가 비용과 나눠주는 제품은 차치하더라도 주말에 직원들을 동원하게 되므로 직원들에게 대체 휴무를 주거나 일당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직원들 역시 대부분 부스를 직접 운반·설치하고 해체·배송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다.

한 수의관련 업체 직원은 “올 한 해 주말에 행사 참여한 날이 38일이나 된다”고 말했다.

 

인체용 제약사 등 다른 분야에서 8년간 마케팅 업무를 하다 올해 초 수의관련 업체에 마케팅 담당자로 온 B씨 역시 같은 입장을 전했다.

B씨는 “처음 회사에 입사한 뒤 회사의 마케팅 방법을 보고 매우 놀랐다”며 “이런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제약업계에서도 약사나 의사 대상의 마케팅이 많지만 수의계는 특별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B씨는 “새롭운 마케팅 방법을 회사에 권유해봤지만 ‘이 분야는 이 분야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라며 “이제는 나도 이런 분위기에 적응해버린 상태”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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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가 시작되면 업체 관계자들은 부스를 정리한다.
부스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일은 대부분 직원들이 직접 담당한다.
부스 설치·해체 때문에라도 직원이 3~4명은 필요하다.

“신제품 출시 시기 아니라면 홍보할 것도 없어”

“수의업계 전반적인 발전 위해서 일반인 대상 홍보 하고 싶지만, 수의사 행사 참여하기도 예산 부족해”

반려동물 사료업체에서 오래 종사한 관계자 C씨 역시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C씨는 “여러 행사에 참가하는데 대부분 아는 수의사 분들을 만나게 된다. 이 분들은 이미 우리 제품을 다 알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홍보할 것도 없다. 그저 만나서 인사하고 안부를 묻기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C씨는 이어 “신제품이 출시된 경우에는 제품을 소개하고, 샘플을 주는 등 홍보 효과가 있지만, 그런 시기가 아니라면 부스에서 솔직히 할 일이 없다”며 “일반인 보호자 대상의 홍보가 훨씬 효과가 높다”고 덧붙였다.

C씨에 따르면, 수의사 학회·세미나의 경우 강의가 시작되면 부스가 텅 비어버리는 데 반해 일반인 대상의 반려동물 박람회는 늘 사람이 붐벼 홍보 효과가 낫다는 것이다. 강의가 주 목적이 아니라 업체와 제품을 보기 위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C씨는 마지막으로 “반려동물 산업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보호자 대상의 홍보가 필요하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와 행사가 많아져야 결국 관련 시장이 성장하고 수의사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큰 수의학회 참가 비용이면 보호자 대상 행사를 여러 번 진행할 수 있다. 업체의 이런 고충을 꼭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현재 메이져 수의사 학회의 부스 비용은 수 백만원에서 수 천만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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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개 사료 유통경로. 수의사를 통한 유통은 4.5%까지 감소했다.

“동물병원 통한 제품 유통 줄어드는 이유도 고려해야”

“업체, 동물병원 진입 장벽 높아…차라리 인터넷·마트 통한 유통이 편해”

일본 애완동물사료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약 4.5조원) 중 수의사를 통한 유통은 4.2~4.5% 수준이다. 마트, 인터넷을 통한 사료 판매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반면, 수의사를 통한 사료 유통은 4년 연속 감소했다.

우리나라 사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역시 동물병원 채널을 통한 사료·용품 유통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C씨는 이에 대해 “양질의 제품을 만들어 동물병원 전용으로 출시한 뒤, 수의사들을 통해서만 유통하는 것은 모든 업체가 바라는 바람직한 유통 구조일 것이다. 하지만 동물병원으로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수의사들에게 제품 인지도를 쌓기 위해서는 수의 관련 행사에 부스로 참여해 제품을 알리고, 직접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마케팅을 해야 하며, 지역 수의사들을 대상으로 별도 세미나까지 진행해야 하는데, 이 비용이 상당하다. 많은 업체들이 동물병원 채널을 활용하려다 마트·인터넷 채널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덧붙였다.

 

업계 수의사들 “우리도 수의사죠”

수의관련 업계에는 수의사 직원이 많다. 대부분 학술팀이나 마케팅, 연구 부서에 근무한다. 대한수의사회에 따르면 2014년 6월 기준으로 약품회사나 사료회사, 수의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수의사는 총 938명이다. 1,000명 가까운 수의사들이 수의관련 업계에 근무하지만 이들에게도 큰 고충이 있다. 바로 동료 수의사들에게 받는 상처다.

업계에 근무하는 수의사 D씨는 수의사 행사에 후원 물품을 제공했다가 오히려 후원 물품에 불만족한 수의사에게 핀잔을 들었다. D씨는 수의관련 업체 직원이기도 하지만, 회사에 취직하기 전 임상 수의사로 몇 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수의사’다.

업계 수의사 E씨 역시 비슷한 의견을 전했다.

E씨는 “수의사 면허는 하나다. 임상을 하다가 업계로 올 수 도 있고, 업계에 있다가 공무원이 되기도 한다. 또 업체에 근무하다 임상으로 되돌아 가는 경우도 많다”며 “다 같은 수의사인데, 지금 내가 업계에 있다고 동료 선후배 수의사들의 무시를 받으면 기분이 굉장히 상한다. 이것이 업계 수의사들이 회사를 금세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임상 수의사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최근 수의관련 사업을 시작한 수의사 F씨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업체의 부담이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업을 시작하고 업체 입장이 되어보니 업체의 고충이 이해된다”고 전한 바 있다.

 

“우리도 업계 입장 이해, 업계와 상생할 수 있는 방안 찾기 위해 노력”

“행사 횟수 줄이고, 일반인 참여 프로그램 구성 높일 필요 있어”

한편, 수의사회나 임상 수의사들 사이에서도 업계와 상생관계로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한 지부수의사회 이사 G씨는 이사회에서 “업체의 부담이 증가하며, 이 부담이 다시 임상 수의사에게 전달된다. 일부 업체는 행사에 참가해 행사 성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오히려 수의사에게 제품 구입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는 수의사와 업계의 관계가 상생관계가 아니라는 증거다. 업계와 수의사들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주형 한국동물병원협회(KAHA) 회장은 “업체입장에서 부스참여나 광고하는 것은 일종의 투자 목적이다. 이것이 강압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며 “수의사와 업체가 갑·을 관계라는 것은 오해다. 후원이 없다고 피해를 주거나 압박하지 말고 업체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전했다.

손은필 서울시수의사회장은 “새로운 학회, 세미나가 많이 생기면서 업체의 부담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라며 “쉽지 않겠지만 업계와 수의사들의 상생을 도모하고 수의사 회원들도 효율적으로 강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학회를 함께 개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의사와 업체,갑·을 관계 아닌 상생관계 구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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