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수의학은 개별 동물을 치료하는 임상 수의학의 범위를 넘어선다. 수의학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동물의 건강을 증진함으로써 인류의 공중 보건, 안전한 먹거리, 생태계의 건강을 수호하는 포괄적인 학문이자 실천 영역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동물의 건강이 곧 인류와 환경의 건강’이라는 원헬스 개념이 강조되면서, 공공수의학은 원헬스의 핵심 축으로서 사회 시스템 전체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환경 속에서 신종 감염병의 위협이 상시화된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수의사는 ‘동물의 의사’를 넘어 ‘공동체의 파수꾼’이다.
공공수의학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위협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능동적 예찰’에 있다. 국내에서 발생한 고양이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감염 사례는 반려동물이 신종 인수공통감염병의 잠재적 매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존 가축방역망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정밀 사후 진단 체계를 시급히 확립해야 한다.
부검을 비롯한 사후 진단 능력은 증거기반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의 정점이자, 공공수의학의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는데 필수적인 핵심 역량이다. 이에 대한 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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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의 수의과대학 교육 현장은 구조적 한계와 현실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질병 진단 인프라는 파편화되어 있으며, 교육용 기증 사체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다.
진단역량에 대한 교육 공백을 메우고 글로벌 수준의 국가 방역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학술적 전문성을 보유한 수의과대학 내 ‘진단센터’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공공 방역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하여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가장 실효적인 대안이다.
수의과대학 내 ‘진단센터’는 ‘병성감정기관’과 그 목적과 기능에서 명확히 차별화된다. 국가 기관(농림축산검역본부), 지방자치단체(동물위생시험소), 그리고 민간지정기관(대학 및 민간연구소)이 운영하는 ‘병성감정기관’은 법정전염병에 대한 규제와 차단 방역에 초점을 맞추며, 국가 지정 전염병의 확산 방지를 위한 표준화된 진단 검사를 수행한다.
반면, 수의과대학 ‘진단센터’는 병성감정기관의 역할과 함께 종양, 퇴행성 질환, 원인 불명의 급사 등 질병 전반에 대한 정밀진단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며, 학제간 협진에 기반한 탐구적 분석을 수행한다.
국가 기관이 신고된 질환의 원인을 신속히 ‘규명’하여 행정 처분을 내리는 데 집중하는 반면, 대학내 진단센터는 풍부한 학술 인프라를 활용하여 원인불병의 폐사체나 만성 질환의 원인 규명, 역학 및 병태생리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예방과 치료 대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처럼 수의과대학 내 ‘진단센터’는 기존 가축방역망이 놓치는 방역의 빈틈을 메우는 고도의 정밀 예찰 기관인 동시에, 사후 진단과정에 대한 교육 주체로서 그 존재 가치를 가진다.

물론 한국 상황과 약간 다른 면이 있지만, 북미 및 유럽의 주요 수의과대학들은 ‘임상-병리-진단-연구’가 선순환되는 ‘진단센터’를 독립 기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코넬대의 Animal Health Diagnostic Center AHDC, UC Davis의 California Animal Health and Food Safety Laboratory System (CAHFS), 미시간주립대 Veterinary Diagnostic Laboratory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진단센터는 후속세대에 대한 교육 연구 시설을 넘어, 동물질병 감시 및 대응체계의 핵심인 국가동물보건실험실네트워크(National Animal Health Laboratory Network, NAHLN)의 일원으로서 정부의 공중보건 및 방역 인프라로서 핵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관할 정부가 수의과대학에 예산을 지원하는 결정적 근거이자 공공수의학적 기여도를 평가하는 척도로 활용된다.
이들 진단센터를 중심으로 수의과대학 학생들은 부검 현장으로부터 채취된 시료에 대한 조직검사, 미생물진단, 분자진단 및 독성물질 검사 등 다양한 진단 검사가 연계되는 과정을 체득하며 실무형 전문가로 성장한다. 이러한 ‘플랫폼’에서 배출된 인력이 국가 공공수의학의 미래를 책임진다.
또한, 대학 진단센터에 축적된 데이터는 정밀진단 기법 개발, 질병의 예방 및 치료 가이드라인 확립, AI 기반 질병 예측, 백신 및 신약 개발 연구의 핵심 인프라로 활용되며, 수의학 관련 산업 발전을 견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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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수의과대학 내 부검 및 사후 진단에 대한 교육 공동화(空洞化)는 미래 공공수의학 중추인 후속 세대의 진단 역량 결여라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임상 소견, 부검을 통한 육안 병변, 그리고 감별진단을 확진·배제하기 위한 다양한 정밀 진단 검사 결과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교육할 수 없다면, 수의사의 핵심 자질인 ‘병태생리적 통찰력’은 심각히 저하될 수밖에 없다.
질병의 원인과 발현부터 결과(사후)에 이르는 전과정을 통합적으로 관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 학생들은 단편적인 검사 수치에만 의존하는 ‘기계적 수의사’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또한, 진단 역량이 부족한 차세대 수의사들이 방역과 임상 현장에 투입되면 신종 병원체(원인)를 빠르게 찾아내지도, 초기에 대응하기도 어렵다. 이로 인해 국가의 방역 역량은 낮아지고, 공중보건 수준은 하락하며,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국내 수의과대학은 현재 진단센터 운영에 필수적인 병리학, 임상병리학, 미생물학, 전염병학, 독성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전문성과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각 연구실 단위로 분절되어 있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우수한 인적 자원과 첨단 장비가 존재함에도 이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묶어낼 운영 체계의 부재가 아쉬운 현실이다.
대학은 폐쇄적인 연구실의 문을 적극적으로 개방해야 한다. ‘진단센터’를 중심으로 통합적인 운영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진료-부검-진단-교육이 단일 플랫폼 내에서 유기적으로 선순환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실시간으로 연계되는 정밀 진단 과정을 직접 교육함으로써, 국가 방역과 공중보건의 미래를 책임질 공공수의학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수의과대학의 잠재력을 국가적 자산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자체의 제도적,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단순히 진단 장비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학내의 여러 전문가를 하나로 묶어 진단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전담 전문 인력(수의병리학자, 미생물학자, 독성학자, 진단 테크니션 등)의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원해야 한다.
운영비를 직접 지원할 수도 있고 ▲지자체 관내 유기 또는 야생동물 건강관리 및 질병모니터링 사업 ▲권역별 동물질병 발생 감시 사업 ▲국가 항생제 내성 모니터링 사업 등 진단센터가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공공사업이나 연구를 지원하는 형태로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지자체는 대학과 협력하여 동물 사체 기증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고 참여 유인을 강화하여, 수의학 교육용 기증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러한 노력과 동시에 일선 수의사와 대학은 시민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여 ‘교육·연구용 사체 기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윤리적 예우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대한민국 수의과대학은 이미 공공수의학 구현을 위한 ‘진단센터’ 구축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미래 세대가 현장 중심의 공공수의학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대학 내 개별 연구실 간의 칸막이를 허무는 통합 운영 체계의 확립과 정부 및 지자체의 전폭적인 행정·재정적 지원이다.
특히 현재 수의계에서 입법을 추진 중인 ‘동물의료법(가칭)’이나 ‘대학동물병원지원법(가칭)’은 공공수의학 역량 교육을 위한 진단센터에 대한 국가 지원의 명확한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대학 내 진단센터가 기존 국가 방역망을 보완할 핵심 인프라로 승격되고, 법적 지원 체계가 공고히 될 때, 비로소 포스트 팬데믹 시대 대한민국의 공공수의학은 모래 위의 성이 아닌 견고한 요새로 거듭날 것이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김용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