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부터 청소년 직업 특강을 꾸준히 나가고 있다. 횟수로 따지면 어느새 20회 가까이 됐다. 주로 수의사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자리다. 수의사의 진로, 종류, 하는 일, 보람과 힘든 점, 필요한 역량까지 두루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빠뜨리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임상 수의사는 동물만 보는 직업이 아니다.”
동물을 보는 시간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람, 즉 보호자를 상대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절반이 넘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진료실의 모든 순간은 보호자와 함께다
반려동물이 병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료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은 보호자와 함께다.
내원한 환자의 기본 정보와 질병 이력, 증상 등도 보호자 상담을 통해 얻는다. 병력 청취는 보호자의 입에서 나오고, 검사 하나도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진행할 수 없다. 치료 방향도, 방법도 보호자와 상의해서 결정한다.
어느 하나 보호자 없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없다.
결국 수의사의 일은 보호자와 함께 결정하며 설득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설득이 잘 되려면 소통을 잘해야 한다.
실력보다 먼저 오는 것
소통 능력이라고 하면 흔히 말을 잘하는 기술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시쳇말로 말빨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보호자는 수의사를 믿을 때 그 사람의 출신이나 경력만 보지 않는다. 진료실에서 자신과 반려동물이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먼저 본다.
내 반려동물을 진심으로 대하는지, 자신의 마음도 헤아려주는지를 먼저 본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차갑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보호자는 마음을 닫는다. 수의사의 제안에 선뜻 따르지 않는다. 반대로 실력이 도드라지지 않아도 나와 내 반려동물을 따뜻하게 대하는 수의사에겐 마음을 열고 신뢰를 건넨다. 공감이 먼저다.
경청은 기본이다. 보호자가 말하는 중간에 끊거나 고압적인 자세를 취해선 안 된다. 보호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언어뿐 아니라 표정과 제스처 같은 비언어적 신호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같은 말을 해도 얼굴 표정이 굳어 있거나, 손을 계속 만지작거린다면 ‘불안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보호자가 실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때 비로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보호자가 “수의사가 내 말을 잘 들어준다, 나를 이해해준다”고 느끼는 순간 신뢰가 쌓인다. 라포(Rapport)가 형성된다.
보호자의 반응을 바꾸는 라포
내 판단엔 경과가 좋은데 보호자는 불만이고, 내 판단엔 회복이 더딘데 보호자는 오히려 고마워하는 상황. 이런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치료 결과를 바라보는 ‘눈’을 라포가 바꾸기 때문이다.
수의사와 보호자 사이에 라포, 즉 친밀하고 긍정적인 관계가 깊게 쌓일수록 치료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수의사를 전적으로 믿는 보호자는 경과가 좋지 않아도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신뢰가 없는 보호자는 경과가 좋아도 불만이 생긴다.
슬개골 탈구 수술 후 재발이 됐을 때, 라포가 탄탄한 보호자는 “괜찮아요, 재수술하면 되죠”라고 말한다. 반대로 라포가 없는 보호자는 충분히 재발 가능성을 고지했음에도 항의한다.
중환자가 끝내 회복하지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수의사를 신뢰하는 보호자는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 고맙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보호자는 흥분하며 따진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수는 ‘사전 안내’다. 예상 비용, 치료 기간, 예후를 미리 상세히 들은 보호자와 그렇지 못한 보호자는, 똑같은 결과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전자는 어느 정도 예상한 범위 안이라 받아들인다. 후자는 기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한다. 아무리 바빠도 모든 케이스마다 가능한 한 사전에 상세하게 안내해야 하는 이유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피부 질환 치료 후 좋은 반응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냉랭하던 보호자, 예상보다 회복 경과가 더뎌 불편한 반응을 예상했는데 오히려 긍정적이었던 보호자. 반려동물의 치료 결과와 크게 상관없이 나를 얼마나 믿었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의대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
수의대에서는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을 배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공부, 심리학이나 소통에 대한 내용은 따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막상 현장에 나오면 금방 알게 된다. 동물을 잘 아는 것만큼 사람을 알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호자와의 소통이 만족도와 재방문, 추천율에 영향을 주고, 이런 요소들이 동물병원의 매출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연구·보고도 적지 않다. 모든 일은 결국 사람으로 귀결된다.
그러니 예과 때 교양 수업을 들을 수 있다면, 심리학이나 상담학, 커뮤니케이션 관련 과목을 하나쯤 챙겨 듣길 권하고 싶다. 수의대 커리큘럼에 사람의 심리와 행동, 소통에 관한 과목이 정식으로 자리 잡으면 더 좋겠지만, 그 전까지는 각자가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오늘부터 촌각을 다투는 응급이 아니라면, 진료에 들어가기 전에 보호자와 눈을 한번 맞추어 보는 건 어떨까.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거나, “많이 걱정되셨죠”라고 말 한마디 건네보자. 그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 보호자는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