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항 교수 ˝3·1운동 적극 도운 스코필드 박사,수의사로서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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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수의학자이며 기독교 선교사로, 한일합방과 일제의 무단정치에 항거하여 3·1 독립운동을 일으킨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우는 외국인 수의사가 있습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건국공로훈장(국민장)을 받았고, 지금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들어 있는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Schofield)박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11월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올해는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에 온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랑이스코필드박사기념사업회가 활동 중이며, 올해는 특별이 ‘스코필드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활약할 예정입니다.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정식 출범일(2월 22일)을 앞두고 100주년 기념사업회 실무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는 서울대 수의대 이항 교수님을 만나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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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스코필드 박사는 어떤 분이었나?

스코필드 박사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뒤 1907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토론토대학교(현 겔프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해 수의사가 됐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왼팔과 오른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지팡이에 의지에 살아야 했다. 1911년 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14년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세균학 교수가 됐다.

한국에 인연이 닿은 것은 100년 전인 1916년이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초대로 한국에 와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다. 이후 한국어를 배우면서 선교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었는데, 石(돌 석)은 그의 굳은 의지를, 虎(범 호)은 호랑이를, 弼(도울 필)은 한국인을 돕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하고 굳센 호랑이의 마음으로 한국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기념사업회에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는 3·1독립운동을 적극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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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가 직접 촬영한 3.1운동 사진 ⓒ국가보훈처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의 부탁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하여,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모습과 시위자에 대한 일경의 만행 등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한국 사정을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제암리 양민 학살사건과 민가 방화사건이 발생하자, 소아마비의 몸을 이끌고 자전거를 몰아 100리가 넘는 길을 달려 제암리의 모습을 촬영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널리 알렸다.

일제로부터 강제 출국 당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박사는 해방 후 1958년 한국을 다시 찾아 1970년 눈을 감기까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어려운 국민들에게 자선활동을 펼쳤다. 이에 서울대 수의대 건물에 스코필드 홀도 설립되어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최근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도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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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설치된 스코필드 박사 동상

나는 스코필드 박사가 굉장히 다면적인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독립운동가였으며, 수의사였고, 의학자였으며, 선교사 및 사회사업가(박애주의자)였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 전문가가 사회 참여하는 경우가 적은데, 그는 수의사로서 주변의 현실에 눈감지 않았다. 의학자로서도 크게 활약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스페인 독감 케이스를 미국의학회지와 중국의학회지에 보고한 것이다. 지난 2007년 대한의학사학회 창립 60주년 학술대회에서 이 내용이 소개됐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특히 우리 수의사들이 참고하고 롤모델로 삼아야 할 분이라고 생각한다. 희생정신이 강했던 분이다.

Q.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어떻게 구성됐고 어떤 역할을 하나?

스코필드박사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드문드문 행사가 있었지만 조직화되지 못하고 있다가,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이던 시절 이문한 당시 수의과대학 학장과 함께 기념행사를 시작하고, 호랑이스코필드 동호회가 조직됐다. 동회회 수준으로 활동을 하다가 정식 법인을 설립하고 기념사업을 체계적으로 해보자는 취지에서 2010년 사단법인화됐다. 매년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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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의대 수의학교육실에 보관 중인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감사장

Q. 이번에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어떤 이유에서 사업회가 별도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스코필드 박사는 어느 애국지사 못지않게 대한민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올해는 특히 박사가 처음 한국에 발을 디진지 100년, 그리고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7년이 되는 해다. 이 시점에 스코필드 박사와 3·1운동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지침으로 삼고자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별도로 구성한 것이다.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완전히 별개 조직은 아니고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실무업무를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한국고등신학연구원이 공동으로 담당하는 형태다.

정운찬 전 총리가 100주년 기념사업회 의장을 맡았으며, 김재홍 서울대 수의대 학장, 에릭 월시(Eric Walsh) 주한 캐나다 대사, 엘리자베스 스톤 겔프대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학장, 정남식 연세대 의료원장, 채인석 화성시장, 유진 카이스트 교수, 유근배 서울대 기획부총장 등의 위원회 위원으로 함께 하며, 성낙인 서울대 총장,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등도 고문단으로 함께한다.

또한,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광복회, 주한캐나다대사관 등에서 기념사업에 동참한다.

2월 22일(월) 프레스센터에서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을 가진 뒤 ▲3·1만세 운동 97주년 기념 세미나(2월 29일~3월 28일, 주한캐나다대사관) ▲스코필드 에세이 및 논문 콘테스트(3월 1일~31일) ▲제14회 추모기념식(4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및 서울대) ▲해외 스코필드 특별전(6월, 미국) ▲스코필드 박사 후손 한국초청(8월 15일 광복절)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11~12월) 등의 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더 많은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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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월 15일 광복절에 이승만 대통령과 스코필드 박사 모습.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박사의 책은 한국의 독립을 제대로 기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건 한국뿐만이 아니라 동양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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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는 스코필드 박사 ⓒ대통령기록관

Q.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의사는 특수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수의학과 동물분야에서만 일하면 내 소임을 다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코필드 박사는 내가 처한 사회 문제를 모른 척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수의사들이 이를 본받아 관점을 넓게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동물을 위해서 일하는 전문가이지만, 사람도 동물이지 않나. 동물을 행복하게 하려면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 사람이 불행하면 동물에게도 불행이 미친다. 어떻게 보면 수의사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직종인 것 같다. 우리의 관점과 비전을 넓히는 데 스코필드 박사를 하나의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다. 특히, 수의학도 들이 스코필드 박사의 전기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장래에 대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인터뷰]이항 교수 ˝3·1운동 적극 도운 스코필드 박사,수의사로서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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