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소희 – 쵸파를 꿈꾸던 소녀, 미국수의외과전문의가 되기까지

“겨울에도 벚꽃은 핀다” UC데이비스에서 외과 전문의 과정 마친 배소희 수의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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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청수콘서트에서 게스트로 나선 배소희 수의사

지난 8월 30일(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제9회 청수콘서트가 열렸다.

이번 청수콘서트 트랙3는 한국수의최소침습의학연구회(KVMIS)가 주관한 특별 세션으로 진행됐는데, 이 자리에 깜짝 게스트로 배소희 수의사가 소개됐다.

배 수의사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일반외과 석사 과정(지도교수 김완희)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Oregon State University에서 소동물 로테이팅 인턴십과 외과 인턴십을 연이어 수료했으며, 이후 레지던시 매칭을 기다리던 중 캐나다로 건너가 Toronto Animal Health Partners에서 소동물 외과 인턴십을 한 차례 더 수행했다. 과정 중, Purdue University에서 김순영 교수님(미국수의외과전문의(DACVS))의 지도 아래 Short-term AO Fellowship을 마쳤다. 그 결과,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의 소동물 외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합격했고, 최근에 수련 과정을 마쳤다.

배 수의사는 곧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NCSU)에서 교수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예정이다.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잠시 한국에 들어온 시점에, 모교에서 열린 청수콘서트에서 강연을 한 배소희 수의사를 데일리벳이 만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강아지와 함께 자란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동물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흐름 속에서 수의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다만,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만화 ‘원피스’의 ‘히루루크의 벚꽃’이라는 에피소드가 큰 영향을 주었다. 극 중에서 히루루크 박사와 쵸파를 보면서 “나도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남을 고쳐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막연한 철학을 갖게 되었고, 이런 생각들이 쌓여 결국 수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서울대 본과 4학년 임상 로테이션 과정 중 처음 배정받았던 섹션이 일반외과였다.

그때 상완에 피부 결손이 생긴 리트리버 케이스를 접했는데, 김완희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피부 비판을 이용한 결손부 재건수복하는 방법을 두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상급자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수직적 구조를 예상했지만, 오히려 대학원생의 의견이 존중되고 실제 치료 계획에 반영되는 모습을 보면서 일반외과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또, 어릴 때부터 종이접기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런 성향도 외과와 잘 맞았던 것 같다. 종이접기 책을 열 권 가까이 사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지금 외과 수의사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학부 시절부터 막연히 있었다. 이후 외과 대학원에 진학한 뒤, 2013년에 교수님과 ACVS(미국수의외과학회)에 가서 더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이 아마도 시작점이 됐던 것 같다. 그때도 막연하게 미국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쳤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졸업 후, 헬릭스동물메디컬센터에서 일하던 중 무급휴가를 내고 미국에 3개월 동안 연수를 갔던 경험이었다. 당시, 황정연 원장님의 배려 덕분에 UC Davis(UC데이비스 수의과대학), University of Tennessee(테네시대학교 수의과대학), NCSU(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 수의과대학)에 각 한 달씩 ‘Visiting Practitioner’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수의과대학 시스템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서울대 동기이자 현재 스탠다드동물의료센터 정준모 원장의 조언과 현재 미국수의스포츠재활의학전문의(DACVSMR)인 김아영 수의사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어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미국에서 ‘전문의’에게 요구하는 자격요건이 매우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수술 건수를 많이 채우는 게 아니라, 외과 내 세부 분야별로 일정한 케이스를 반드시 경험해야 전문의 시험 자격이 주어지는 구조였다. 이런 체계적인 시스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서울대 외과대학원 시절을 돌이켜보면 운 좋게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특정 수술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 다른 병원으로 파견을 보내서라도 수술-케이스 기준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전문의 제도가 상당히 체계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수의외과전문의, 아시아수의외과전문의 과정이 생겨나면서, 점차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UC데이비스 소동물병원 앞에서

솔직하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10% 정도로 매우 작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기, 운, 주변 환경 같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매우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신뢰 기반의 사회라 좋은 추천서가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런 건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다. 또, 같은 시기에 나보다 조건이 더 좋은 지원자가 있다면, 한정된 자리를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는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집착하기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10%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데 집중했다. 인턴 기간 동안 매년 논문 한 편씩을 작성했으며, 학생 지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언제든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야간 근무 이후에도 흥미로운 수술이 있으면 아침까지 남아 꼭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노력과 준비, 그리고 시기와 운,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함께 어우러져 합쳐져서 레지던시에 매칭될 수 있었던 것 같다.

Purdue University에 계신 김순영 선배님(퍼듀대학교 수의과대학 소동물외과 교수)의 따뜻한 조언과 적극적인 지지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언어적·문화적 장벽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 인턴/레지던트 동료, 외과교수님 등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크게 힘든 일은 없었지만, 문화적 차이로 인해 문맥의 미묘한 뉘앙스를 놓쳐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겸손이 미덕이지만, 미국에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점차 미국 사회에서 신뢰를 형성하려면 자신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언어적인 어려움도 컸다. 다른 사람들보다 논문, 교과서를 읽고 지식을 익히는 데 두 배는 더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렇지만 가족들의 지지와 Louisiana state university 이정하 교수(미국수의병리전문의(DACVP),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병리학 교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고, 한국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수현 안과 교수님(미국수의안과전문의(DACVO), UC데이비스 수의과대학 외과 교수) 또한 든든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박상완 박사(안과)와 김재영 박사(종양내과)가 함께 UC데이비스에서 레지던시 과정을 밟으며 곁을 지켜주어, 늘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왼쪽부터) 배소희, 박상완, 김재영 수의사. 3명의 수의사는 모두 서울대 수의대를 졸업했으며, 같은 시기에 UC데이비스 수의과대학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연구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연구는 힘든 과정이지만, 새로운 지식을 서로 교환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큰 매력을 느낀다. 인턴/레지던시 과정 중에 여러 연구에 참여했지만, 특히 레지던시 리서치 멘토였던 Dr. Marcellin-Little 교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연구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진 것 같다.

또한,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수의대를 졸업한 후 13년 동안 수많은 스승을 만나면서, 내가 누린 만큼 나도 후배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교육 과정을 모두 밟아 본 사람으로서 각자의 장점과 보완할 점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수의학 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무엇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 경험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부생 시절은 기회의 문이 가장 많이 열려 있는 때이니,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는 게 좋다.

그리고 반드시 선배들에게 많이 물어보기를 권한다. 이미 그 길을 걸어본 사람들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된다. 나 또한 레지던시 과정을 준비하면서 김순영 교수님(Purdue University), 김수현 교수님(UC Davis), 김종민 박사님(미국수의외과전문의(DACVS), VCA West Coast Specialty and Emergency Animal Hospital), Dr. Kapatkin 교수님(UC Davis), Dr. Chou 교수님(UC Davis) 등 많은 분들의 조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적극적인 자세로 경험을 쌓는 걸 강력히 추천한다.

  

배소희 수의사가 어린 시절 즐겨보던 ‘원피스’에서 닥터 히루루크는 “겨울에도 벚꽃을 피울 수 있다”고 믿었다. 쵸파는 그 믿음을 이어받아 세상의 상처를 보듬는 의사가 되었다.

배소희 수의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쵸파의 성장 서사가 자연스레 겹쳐 보였다.

낯선 땅에서 맞닥뜨린 언어와 문화의 벽, 끝없이 이어진 수련의 시간, 그리고 다시 연구와 교육으로 향하는 걸음을 통해, 그는 스스로의 ‘벚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벚꽃은 소란스럽지 않지만,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피어나 누군가의 겨울을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히루루크가 쵸파에게 남겼던 믿음처럼, 그 역시 자신만의 확신을 품고 있다.

겨울에도 벚꽃은 필 수 있다.”

오늘도 배소희 수의사는 그 믿음을 따라 걸으며, 차가운 세상 속에서 작은 벚꽃들을 한 송이씩 피워내고 있다.

이한희 hansoncall9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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