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병진 수의사 ˝수의사라면 어려움에 처한 동물 당연히 도와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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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운영보다 유기동물 보호와 봉사활동을 중요시하는 수의사가 있습니다.

고양시수의사회 회장시절부터 유기견을 본격적으로 돌보기 시작하여, 포천 애신의 집 보호소에서 꾸준히 중성화수술을 실시해 개체수 조절을 가능하게 만들고, 고유거(고양시 유기동물 거리입양 캠페인)를 사단법인화 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현재 경기도수의사회 동물복지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병진 원장님(작은친구동물병원)이 그 주인공입니다.

“수의사는 동물을 통해 돈을 번다. 그런데 아픈 동물, 어려움에 처한 동물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재물, 명예, 인기 등에 자신이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 미얀마로 수행을 떠나는 한병진 원장님을 데일리벳에서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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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떻게 수의사가 됐나?

고 2 시절 사춘기가 왔을 때 내 자신을 돌아보니 우울해지더라. 키도 작고 잘사는 애들과 경제적으로도 비교도 되고.

그런데 그 때 문득 ‘나도 이렇게 우울한데 장애를 가진 친구들은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이 되어서 세상을 유랑하면서,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래도 일단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중이 돼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살게 되면 그 동네에 있는 아픈 소, 개 등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수의학과를 선택했다.

집이 가난하다 보니 국방장학생을 신청하여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 후 7년간 군 생활을 했다. 군 생활 후 중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IMF 터지면서 집안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임상을 시작했다. 산업동물 분야의 경우 ‘동물이 경제적으로 더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수의사가 판단해주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반려동물 임상 분야를 선택했다.

병원을 오픈하고 5~6년 쯤 지났을 때 중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과 단절되다보니 너무 외롭더라. 그래서 절에서 나와 막노동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인도에 갔다. 그 곳에서 사람을 화장하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외로움과 삶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됐다.

Q. 임상은 언제 다시 시작한 것인가?

인도에서 돌아와서 얼마 후 다시 동물병원을 시작했다. 동물병원을 운영하면서 고양시수의사회 회장을 맡게 됐는데, 그 때 고양시에서 ‘수의사회에서 유기견을 조금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기견을 돌보기 시작했다. 2009~2010년 쯤 일이다.

Q. 어떻게 유기견을 돌보기 시작했나?

처음에는 고양시에 있는 유기견에 대한 의료봉사만 실시했다. 그때 일정기간 후 안락사 당하는 유기동물들이 너무 불쌍하더라. 그래서 유기동물들을 데리고 와 돌보기 시작했다. 품종이 있는 유기견들은 지역 내 다른 동물병원 원장님들에게 1~2마리씩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품종이 없는 유기견은 내 병원으로 데려와서 관리했다. 아무래도 품종이 없는 유기견들을 입양보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지역 내 23~24개 동물병원 원장님들이 이 일에 동참하여 병원마다 1~2마리씩 유기견을 맡아서 돌보고 입양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입양이 안 되는 유기견들은 다시 내 병원으로 데려와서 관리하면서 입양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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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수의사회 반려동물 문화교실에서 무료 건강검진 중인 한병진 원장(오른쪽)

Q. 포천의 유명한 보호소 중 한 곳인 애신동산 보호소 의료봉사를 오랫동안 진행했는데.

한 분이 포천 애신동산 중성화수술 부탁을 해서 봉사를 시작했다. 근데 포획이 너무 어렵더라. 잡히지 않는 아이들도 많았고, 바닥에 구멍을 뚫어 숨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견사씩 수컷·암컷 모두 중성화수술 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비로 여러 가지 장비를 구입하여 봉사를 시작했다. ‘우공이산’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모든 개체의 중성화가 끝날 때 까지 무조건 계속 한다’는 생각에 매주 가서 중성화 수술을 했다. 숨거나 다른 견사로 이동할 수 있는 구멍이 너무 많아서 시설 수리까지 같이 진행했다.

그때 일반 봉사자 분들 중 한 명이 동물보호단체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때 동물보호단체 회원 분들과 많은 수의사분들이 함께 나서서 애신동산 봉사를 실시하여 지금은 개체수 조절이 되는 보호소로 만들어 놨다. 그 뒤에는 포천 애린원 등 다양한 곳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Q. 고유거(고양시 유기동물 거리입양 캠페인) 활동도 하고 있다.

유기동물을 병원에서 한창 돌보던 시절에 7~80마리의 유기견을 보호하던 한 보호소 소장님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생겼다. 그 보호소의 유기견을 매일 4마리씩 데려와서 미용시키고 구충해서 분양 보냈다. 당시가 이태원, 용산 등에서 유기동물 입양캠페인이 막 시작될 때였는데, 어떤 분의 도움으로 우리 병원에 있던 유기동물도 매주 토요일마다 거리입양을 통해 6~7마리씩 새 주인을 찾게 됐다.

이후 고양시에서도 유기동물 거리입양 캠페인이 시작됐다. 나도 적극 참여하여 진료담당을 맡았고, 사실상 운영진처럼 활동 중이다.

고유거의 경우 이제 경기도 사단법인도 됐고, 미국으로까지 입양을 보내고 있다.

유기동물 거리입양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도 더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수원의 경우에는 한성동물병원 원장님이 자신의 병원 앞에서 거리입양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Q. 경기도 동물복지분과위원회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현 이성식 회장님께서 경기도수의사회 회장이 됐을 때, 내 사정을 듣고 경기도 동물복지분과를 만들어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을 주셨다.

그렇게 첫 해는 예산 없이 시작했다. 지금은 경기도수의사회 예산이 편성되어 봉사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 문제는 해결된 상태다.

(편집자 주 : 지난 2013년 ‘생명이 생명을 만나는 곳’을 모토로 결성된 경기도수의사회 동물복지분과위원회는 그 해 10월 첫 동물의료봉사활동을 시작으로 시흥 엔젤홈, 포천 애린원, 애신동산, 고양 벽제보호소, 평택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 경기도 도우미견나눔센터 등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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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얀마로 떠나신다고 들었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것은 내 생명을 지켜나가는 일종의 센서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다보니 자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제는 과연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에 대한 탐구를 하고 싶다. 수행을 통해 이런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미얀마로 2달간 떠난다.

이번 수행은 나에게도 의미가 크다. 돈, 명예, 인기에서 벗어나자는 의미도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재물, 명예, 인기 등에 늘 연결이 되기 마련이다. 이번 수행을 통해 나 스스로도 이런 것들에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도 확인해보고 싶다.

(편집자 주 : 이미 한병진 원장님은 미얀마로 떠나셨다. 인터뷰를 위해 병원을 방문한 날도 미얀로 떠나기 전 최대한 유기견 개체수 조절을 하기 위해 10여 마리의 유기견에 대한 중성화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병진 원장님이 2달간 떠나는 말을 듣고 보호소에서 유기동물을 데리고 온 것이다.)

Q. 그 사이에 병원은 어떻게 하나?

병원은 문 닫고 간다. 하지만 지금도 병원에서 돌보고 있는 동물들이 있기 때문에 자원 봉사자분들이 매일 와서 밥도 주고 아이들을 관리해주시기로 했다.

Q. 앞으로의 계획과, 수의사와 수의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현재 애신동산의 땅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해 처했다. 고유거가 사단법이 된 만큼 고유거 이름으로 애신동산을 땅을 사서 거기에서 보호 중인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나도 죽으면 내 재산을 고유거에 넣고 싶다. 내 개인적인 꿈은 유기견보호소 주변에 실버타운을 조성하여 사람들이 많이 살게 하는 것이다.

흔히 유기견보호소하면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 시골, 산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 대부분의 보호소가 그런 곳에 존재한다. 나는 유기견보호소 주변을 마을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고, 그 사람들이 유기동물을 돌보면서 함께 어울리는 곳을 만들고 싶다.

유럽의 경우 사회 시스템 자체가 봉사를 하지 않으면 그 분야로 진출할 수 없는 구조다. 일부 유럽 국가의 경우 유기견 1마리에 봉사자가 여러명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그런 문화가 발달하여 사람과 유기동물이 함께 모여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것이 내 계획이자 꿈이다.

수의사분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수의사들은 동물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픈 동물, 어려움에 처한 동물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동물들을 돌보지 않은 채 번 돈을 자랑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파렴치하다는 뜻이 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염치를 모르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수의사의 돈은 동물들의 아픔, 눈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터뷰] 한병진 수의사 ˝수의사라면 어려움에 처한 동물 당연히 도와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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