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 수의사 칼럼 ⑥]오키나와에 가면 잃어버린 동경이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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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taehwan

류쿠왕국은 그렇게 조선의 미래가 되었다. 류쿠왕국은 오키나와의 옛 이름이다.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아열대 기후의 낭만의 섬 오키나와.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발리나 필리핀을 갈 때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는 섬.

한국과 중국 일본본토와 비슷한 거리에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은 오랫동안 독립왕국이었다. 한 중 일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로 가는 뱃길 한 가운데 있어서 해상무역으로 오랫동안 번성한 작은 섬나라였다. 그 섬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여느 다른 따뜻한 남국 사람들처럼 여유롭고 순한 사람들이었고,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류쿠의 ‘테’는 일본 본토로 흘러 들어가 ‘가라테’로 발전하였다. 남방문화는 이곳을 거쳐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영향을 미쳤다.

1879년 평화로운 류쿠왕국은 일본에 의하여 멸망하여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류쿠인과 조선, 중국,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의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일본은 1867년을 기점으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천황제 국가의 기치아래 부국강병, 문명개화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부국을 위해 식민지에서 부를 가져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를 위해 강력한 군사체계를 추구하였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은 류쿠왕국이었다.

슈리성
류쿠왕국의 궁전이었던 슈리성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서구열강은 일본에 출현하여 그들을 압박하였다.

200여 년간 막번 체제를 유지하던 일본사회는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고, 임진왜란 직후인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쇼군(장군)’되어 에도(오늘날의 도오쿄오)에 도쿠가와 막부를 개창한다.

일본 사회는 봉건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나 마찬가지인 ‘번’이 있고, 막부는 그 연합체의 중앙정치조직과도 같았다. 번의 영지는 번주인 다이묘가 다스리고, 막부의 실권자 ‘쇼군’은 다이묘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하기 힘든 구조였다. 쇼군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실권자였다. 또 천황은 정치에 전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였고,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부적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번과 신분제를 바탕으로 200여년 이어져온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외세의 출현에 쇄국론과 개국론, 하급무사의 불만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정치구조에서 문화에 이르기 까지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매튜페리_흑선

이런 가운데 1853년 미 해군제독 페리가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에 출현한 것은 근대일본 탄생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페리는 일본과 통상조약을 요구하며 되돌아갔다. 일본 사회는 격랑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페리는 함선 4척을 대동하며 돌아와 일본과 화친조약을 맺었고 마침내 1857년 미일통상조약을 맺었다. 이즈음 영국, 러시아 등 서구열강과 여러 조약들을 맺고 일본은 ‘ 비자발적인 개국’을 하게 된다.

서구열강에 침탈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속에 개국파와 쇄국파, 막부강화파와 하급무사, 중앙에서 소외된 번주들은 서로 엇갈린 입장 속에 격돌을 벌인다.

이 와중에 동아시아와 전세계적인 영향을 미친 메이지 유신이 단행된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이는 1867년 교토의 천황에게 가서 스스로 정권을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하게 된다.

2년 뒤 모든 번주의 영지를 천황에게 헌납하게 하고 신분제를 폐지하고, 1871년 아예 번 자체를 없애고 천황이 직접 임명한 관리가 파견되는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한다. 이로써 정치독립체였던 번이 역사 속에 사라지고 일본은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다. 그로부터 18년 뒤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됨으로서 절대 권력자 천황이 탄생하게 된다.

서구열강에 대해 대처하는 와중에 근대국가를 탄생시킨 일본은 서구열강의 뒤를 따라 제국주의를 향해 치달아갔으며, 일본열도를 넘어 아시아대륙으로 눈을 돌린다.

메이지유신 단행 후 첫 대상이 바로 류쿠왕국이었다. 1879년 류쿠처분을 통해 오키나와 현으로 강제 병합된 오키나와는 일본제국에 의해 차별동화정책이 유무형으로 진행된다. 본토인들에게 천대받으며 오키나와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오키나와인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 스스로 표준어를 배우게 했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게 만들었다.

미군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던 1945년 3월, 마침내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한다. 외국군과 일본 본토에서 사실상 전투를 치러본 적 없는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인다.

그것은 오키나와와 오키나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일본 본토에서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미군과 협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전쟁에 맨 먼저 내몰린 사람들은 현지 오키나와인들이었다. 이 전투로 당시 오키나와인의 25%인 십 수 만 명이 죽었다. 미군의 총과 화염방사기로 죽어갔고, 미군에 잡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군에 의해 몰살되었고, 미군에 포로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심어 자결하게 만들고 부모 자식 형제자매의 목숨을 끊게 하였다.

먼 열대의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 오키나와인 뿐만 아니라 낯선 조선인들 또한 총알받이와, 강제 노역을 하며 죽어갔고, 조선의 소녀들은 위안부가 되어 와있었다. 오키나와인과 조선인은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지만 같은 얼굴이었다.

오키나와전쟁

결국 일본은 히로히토 천황의 일본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오키나와를 미국에 내주었다.

1972년 일본에 다시 반환하였지만 후텐마 기지를 비롯한 미군기지는 오키나와 20%를 차지하고 주일미군의 75% 가 주둔하고 있으며 일본인구 1%인 오키나와인은 여전히 차별받고 참혹한 사건의 피해자가 되곤 한다. 가끔 기지 주변 민가에 비행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소녀들이 성폭행당하기도 한다. 한 중 일, 동남아, 호주, 인도, 중동에 이르기 까지 아시아 어느 곳으로도 쉽게 출격할 수 있는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가 오키나와를 쉽게 놓아주지 못하게 한다.

나머지 99%를 위해 항상 희생은 먼저, 혜택은 제일 나중인 오키나와인들.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135년이 지난 지금도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의 흐름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류쿠처분이 이루어진 해로부터  21년 뒤 1910년 조선은 제2의 류쿠가 되었다.

조선은 아시아 대륙을 제패하기 위해 일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운요호사건을 시작으로 강화도조약,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며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여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다. 서구열강에게 당하고, 류쿠에서 해 봤던 여러 방식을 조선에 적용하였다. 독자적인 언어와 역사가 부정당하고, 차별을 통해서 천황에게 복종하게 만들고 전국을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일본에게 아시아로 가는 다리일 뿐 만 아니라 그 자체로 제국 일본의 존재의 조건이 되었다.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여 조선의 식량과 자원, 그리고 사람을 수탈해 갔다. 모든 것을 잃은 조선 백성은 움막 같은 집에서 살아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산천을 떠돌아 다녀야 했고,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으며 연명했다.

조선의 소 한우는 특히 일본 제국이 눈독을 들였던 가장 중요한 자원 목록 중 하나였다.  군인들의 군화, 총 멜빵, 허리띠와 같은 각종 군수품에 필요한 가죽으로, 전장에서 군인들이 먹을 통조림 식량으로,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 농촌에서 일꾼으로 쓰였다. 일제가 가져간 한우만 150만두, 소가죽은 600만장이나 되었다.

그들은 지금의 당산동 래미안 아파트 단지 자리에 조선피혁주식회사를 만들어 한우를 각종 군수품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의 시작으로 일본군의 가죽의 수요는 급증하였고 한우만 가지고는 이를 다 채울 수 없었다.마침내 일제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건 조선의 저자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들이었다.

1940년 3월 8일 조선총독부령 제26호를 통해 ‘조선원피주식회사’로 하여금 개가죽 및 개모피를 독점매입하게 하였다.

개 가죽에 대해 5등급으로 분류하여 매당 74전~2원28전을 주도록 하였다. 일제는 필요한 가죽을 얻기 위해 국책사업으로 조선의 개 가죽을 벗겨가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조선의 개들은 모조리 도살되었다. 1938년, 1942년 지정개가 된 진도견과 풍산개를 제외하고…

한해에 적게는 10만 매, 많을 때는 50만매가 매집되었다. 조선 고유의 개들은 씨를 찾기 힘들 지경까지 갔다. 일제는 필요로 하는 개 가죽만 가져갔고, 조선에 남은 건 가죽이 없는 개의 살덩이었다.

초근목피도 찾기 힘들던 조선백성들이 일제가 버리고 간 개 살덩이를 먹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비록 조선이 해방되었다고 하나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것조차 파괴되어버린 한반도는 정말 가난하여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일제 말기부터 수 십년간 헐벗은 시절을 보낸 서민들에게는 개고기 먹는 것은 마치 하나의 풍습처럼 되었다.

몸보신을 위해 개고기 먹는 것을 전통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고통스러운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생긴 슬픈 역사의 산물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먹거리가 풍요로운 시대에도 음식메뉴에 개고기가 남았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첨성대앞동경이
경주 첨성대 앞 동경이

일제의 개 가죽 공출이전부터 일본인들이 특히 싫어하는 개가 있었으니 경주 지방에 많이 키우던 동경이었다. 

동경이는 진돗개 비슷하나 꼬리가 없거나, 아주 짧아서 특이하게 보인다.

일본인들은 동경이가 기형처럼 보인다고 재수 없다며 보이는 대로 죽였다. 그러나 사실은 동경이가 일본 신사에 있는 고마이누라는 개의 형상과 비슷하게 생겨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들이 상서럽게 여기는 고마이누가 천대받는 조선인들 사이에 다니는 게 얼마나 눈엣 가시였겠는가?

개 가죽 공출이 더해져 동경이는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동경이 보존에 대한 노력으로 2012년 천연기념물 540호로 우리 곁에 돌아오기까지 70여년이 걸렸다.

최근 꼬리퇴화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염색체 분석을 하였는데, 염색체1번 2번에 위치한 유전자 2개가 특이 단백질을 만들어 꼬리를 퇴화시켰다고 한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백주대낮에 아무 이유 없이 조선인들을 죽였다. 표준어를 못하는 오키나와 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으로 오해받아서.

식민지조선인과 오키나와인, 그리고 동경이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에 가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과 위안부, 슬픈 오키나와인의 원혼 뿐 만 아니라 그 어딘가에 동경이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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