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를 떠나보낸 보호자가 다시 병원에 오신다. 서류를 떼러 오시기도 하고 남은 약을 돌려주러 오시기도 한다. 아무 용건 없이 들어오셔서 한참 서 계시는 분도 있다.
그때 내가 여러 번 들은 말이 있다. 오늘은 그중 세 문장을 이야기하려 한다.
“고작 동물인데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저는 왜 순서대로 안 되는 걸까요.”
“왜 하필 우리 아이였을까요.”
세 문장 모두 질문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질문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이거나 어디선가 읽은 틀이다. 보호자는 그 틀을 자기한테 대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셋 다 진료실에서 되돌릴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 되돌릴 수 있다.
* *
“고작 동물인데.”
이 말을 들으신 분은 자기 슬픔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과한가. 이만큼 힘들어하는 게 정상인가.
여기서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것이 있다. 미국수의사회가 보호자용 안내에 적어 둔 문장이다.
“당신의 슬픔은 정상입니다.”
그리고 같은 안내에 이 말이 함께 있다.
“슬픔에는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두 문장을 보호자께 그대로 읽어 드린다. 수의사 한 사람의 위로로 들리면 한 번 듣고 지나간다. 그런데 수의사들이 모인 단체가 공식 자료에 적어 둔 문장이라고 하면 보호자는 그 말을 한 번 더 붙잡는다. 그 차이가 크다.
하나 덧붙일 것이 있다. 그 안내는 “고작 동물인데”라고 말하는 쪽도 적어 두었다. 그 사람들을 ‘좋은 뜻으로 그러는’ 친구와 가족이라고 썼다. 나는 이 대목이 정확하다고 본다. 대개 나쁜 뜻이 아니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크기를 모른다. 그래서 위로하려던 말이 그렇게 나온다.
그러니 보호자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그 사람을 이해하실 필요는 없고, 다만 그 말 때문에 당신 슬픔을 의심하지는 마시라고.
* *
“저는 왜 순서대로 안 되는 걸까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보호자들은 이 다섯 낱말을 꽤 정확히 외우고 계신다. 그리고 그 목록 위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다. 석 달째인데 아직 화가 치밀면 뒤처진 건가. 수용에 닿지 못하면 실패한 건가.
내가 만난 보호자 가운데 그 순서를 차례로 밟아 간 분은 손에 꼽는다.
여기에는 알려 드릴 사실이 있다. 이 다섯 단계의 출발점은 사별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말기 환자들이 자기 죽음을 마주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남겨진 가족의 슬픔에 이 틀이 붙은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애도를 연구한 사람들은 이 모델을 두고 더 세게 말한다. 2017년 마거릿 스트로베와 헹크 슈트 연구진이 죽음과 사별을 다루는 학술지에 이렇게 적었다. 의료인들이 아직도 단계를 ‘처방’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계를 거칠 것이라는 기대가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에게 해롭다고 썼다.
그런데 미국수의사회 안내에 이미 답이 적혀 있다. 당신의 애도는 정해진 틀을 따르지 않고 단계처럼 흘러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보호자께 익숙한 이야기로 바꿔 말씀드린다. 진료실에서 매일 쓰는 약 이야기다.
새 약을 설명할 때 우리는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몇 퍼센트에서 증상이 줄었다는 식이다. 그 숫자는 많은 개체를 모아 낸 결과라서, 그 약이 써 볼 만하다는 근거는 된다. 하지만 오늘 진료대 위의 이 아이가 그 안에 들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의사는 “써 볼 만합니다”라고는 해도 “반드시 낫습니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나는 다섯 낱말과 다섯 단계를 구분해 드린다.
부정도, 분노도, 슬픔도 겪을 수 있다. 다만 그런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과 누구나 그것을 같은 순서로 통과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어떤 감정은 되돌아오고, 어떤 감정은 함께 오고, 어떤 감정은 거의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살펴볼 수 있어도, 그것으로 자신이 몇 단계에 있는지 채점할 필요는 없다. 다섯 낱말은 보호자의 시간표가 아니다.
이 설명을 듣고 얼굴이 조금 풀리는 보호자들이 있다. 자신이 정해진 순서를 따라가지 못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처음 들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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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우리 아이였을까요.”
이 질문에는 나누어 답한다. 답이 있는 ‘왜’와 답이 없는 ‘왜’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의학적인 ‘왜’에는 함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진단명이 무엇이었는지, 병이 어떤 속도로 진행됐는지, 그때 검사지의 숫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진료 기록과 검사 결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모든 원인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이다.
이 질문을 들고 다시 찾아오시는 보호자를 나는 반긴다. 설명을 듣지 못한 빈자리는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 대개 짐작이 그 자리를 메우고, 그 짐작은 거의 언제나 보호자 자신을 겨눈다.
“제가 더 일찍 데려왔더라면 살았을까요?” 이 질문에는 ‘그때 알 수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전제가 사실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아픈 티를 늦게 낸다. 보호자가 이상하다고 느낄 무렵이면 병이 이미 상당히 와 있는 일이 드물지 않다. 또 하루하루의 작은 변화는 매일 마주하는 눈에 가장 늦게 잡힌다. 오랜만에 본 사람이 먼저 알아채는 까닭이다. 무심해서가 아니라 매일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설명해 드리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정보 전달이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우리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그 사실이 보호자를 자책에서 꺼낸다.
반면 “왜 하필 우리 아이였나”는 아무도 답할 수 없다. 나도 못 한다.
그래서 이렇게 권한다. 답을 가진 사람이 있는 ‘왜’는 끝까지 물으시라고. 누구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왜’는 그만 내려놓으셔도 된다고.
이는 질문을 바꿔 드리는 일이기도 하다. 한근태 작가는 『고수의 질문법』에서 이렇게 적었다. “좋은 질문 중 하나는 관점을 전환시킬 수 있는 질문이다.”
“왜 하필 우리 아이였나”를 “그때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나”로 바꾸는 것이 그 전환이다. 앞의 질문은 답이 없으니 물을수록 자책만 남는다. 뒤의 질문은 보호자가 직접 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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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장을 다시 본다.
“고작 동물인데”에는 그 관계의 크기를 남이 정할 수 없다고 답한다. “왜 순서대로 안 되나”에는 따라야 할 정해진 순서가 없다고 답한다. “왜 하필”에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함께 확인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까지 혼자 책임지지는 마시라고 말씀드린다.
셋 다 진료실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의 대화로 슬픔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슬픔 위에 얹힌 오해와 자책을 조금 덜어 드릴 수는 있다.
앞에서 인용한 미국수의사회 안내는 보호자용 책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자료에는 집에서든 병원에서든 가까이 두고 사용하라는 말이 적혀 있다. 병원에 두라고 만들어진 자료다.
앞선 세 문장을 들고 다시 오시는 분이 있다면, 진료실은 병을 설명하던 자리에서 슬픔의 오해를 함께 풀어 보는 자리로도 남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