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수의사가 바로 근처에 개원한다면? 경업금지 약정은 효력이 있을까
최수환 노무사의 인사노무칼럼 29

동물병원에서도 경업금지 약정에 관한 상담이 종종 들어온다. 퇴사한 수의사가 근처에 병원을 열었는데 근로계약서의 경업금지 조항을 근거로 문제를 삼을 수 있는지 묻는 원장의 문의도 있고, 개원을 준비하는데 예전에 서명한 조항 때문에 걱정된다는 봉직의의 문의도 있다.
질문하는 쪽은 다르지만 궁금한 것은 결국 같다. 계약서에 적힌 경업금지 조항이 실제로 효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명했다고 해서 당연히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당연히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 화에서는 경업금지 약정이 어떤 경우에 효력을 인정받고 어떤 경우에 무효가 되는지, 원장과 봉직의가 각각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를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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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했다고 모두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경업금지 약정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맺는 계약이므로 원칙적으로는 유효하다. 다만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자유로운 경쟁을 과도하게 막는 경우에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로서 무효가 된다(민법 제103조).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범위인지에 대해 대법원은 몇 가지 판단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보호할 가치 있는 사용자의 이익이 있는지 ▲근로자의 퇴직 전 지위가 어떠했는지 ▲제한하는 기간과 지역과 직종이 적정한지 ▲근로자에게 대가를 제공했는지 ▲퇴직하게 된 경위가 어떠한지 ▲공공의 이익과 그 밖의 사정은 어떠한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대법원 2010. 3. 11. 선고 2009다82244 판결). 이후 경업금지 분쟁은 대부분 이 기준에 따라 판단된다.
이 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약정서의 문구만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똑같이 ‘퇴사 후 1년, 반경 3km’라고 적었더라도 병원이 어떤 이익을 보호하려 했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주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 법원이 먼저 보는 것은 ‘지킬 만한 이익이 있는가’다
경업금지 약정이 유효하려면 먼저 병원에 법으로 보호할 만한 이익이 있어야 한다. 영업비밀은 물론이고, 영업비밀에 이르지 않더라도 그 병원만 가진 지식이나 정보로서 외부에 누설하지 않기로 약정한 것, 고객 관계, 영업상 신용 등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이익을 인정받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근무하며 쌓은 진료 기술과 경험은 그 사람 자신의 역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병원이 독점적으로 보호받을 대상이 되기 어렵다.
고객 관계도 마찬가지다. 고객은 가격이나 서비스 같은 여러 사정을 따져 스스로 거래처를 고른다고 본 판결들이 있어서, 기존 고객이 옮겨 갔다는 사실만으로 병원의 고유한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인정받기는 어렵다.
반대로 병원이 오랜 기간 비용을 들여 만든 특화 진료 프로토콜이나 독자적인 경영 노하우가 있고, 그 수의사가 이를 깊이 다루는 위치에 있었다면 보호할 이익이 인정될 여지가 커진다. 부원장이나 진료과장처럼 병원 운영 전반에 관여한 수의사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의사를 같은 무게로 볼 수 없는 이유다.
□ 기간과 거리 그리고 대가
보호할 이익이 있더라도 제한의 범위가 지나치면 무효가 된다. 의료계에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다.
한의원에 봉직 한의사로 3개월 남짓 근무한 한의사가 퇴사 후 5년간 10km 이내에서 개원하지 않는다는 약정을 맺었는데, 퇴사 8개월 만에 1.3km 떨어진 곳에 한의원을 열었다. 원장은 개설 중지와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약정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며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2024. 1. 19. 선고 2022가합103330 판결).
법원은 근무 기간에 비해 5년이라는 제한 기간이 지나치게 길고, 경업 제한에 대한 별도의 대가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새 한의원이 들어선 곳은 지하철역과 대형 상업시설, 대규모 아파트 단지 인근으로 이미 의료기관이 밀집한 지역이어서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환자 유출 우려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고, 3개월 근무로 특별한 경영 노하우를 얻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동물병원 사이의 분쟁에서도 이런 사정은 비슷하게 고려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대가’다. 경업금지 약정은 근로자의 생계 수단을 일정 기간 제한하는 것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었는지가 유효성 판단에서 무게 있게 다루어진다.
별도의 수당이나 퇴직 시 지급하는 보상금 없이 근로계약서에 한 줄 넣어 둔 조항은 법원에서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 위약금 조항을 넣으면 해결될까
약정의 실효성을 높이려고 위반 시 위약금을 정해 두는 경우도 있다. 연봉의 몇 배를 배상한다거나 일정 금액을 지급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위약금 조항은 경업금지 약정 자체가 유효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약정이 무효가 되면 위약금도 청구할 수 없다.
약정이 유효하더라도 위약금이 지나치게 크면 법원이 금액을 줄일 수 있다(민법 제398조 제2항). 실제 손해와 동떨어진 금액을 적어 두는 것은 상대에게 압박이 될 수는 있어도 소송에서 그대로 인정되기는 어렵다.
□ 약정을 둔다면 좁고 분명하게
경업금지 약정을 꼭 두고 싶다면 범위를 좁히고 대가를 주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제한 기간은 1년 안팎으로, 지역은 병원의 실제 내원 권역으로, 대상은 운영에 깊이 관여하는 수의사로 한정하고, 약정에 대한 보상을 수당이나 퇴직 시 지급금 형태로 명확히 정해 두는 것이 좋다. 모든 직원에게 일률적으로 넓은 약정을 받는 것보다 이런 약정 하나가 분쟁에서 훨씬 힘을 갖는다.
봉직의 입장에서도 서명한 약정이 언제나 무효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보상을 받았거나 기간과 지역이 합리적인 범위라면 효력이 인정되어 개원 중지나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
개원을 계획하고 있다면 근로계약서의 경업금지 조항부터 다시 읽어 보고, 범위와 대가가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 확인하길 권한다. 분쟁이 생긴 뒤에 다투기보다 약정을 맺는 단계에서 범위와 대가를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원장과 봉직의 모두에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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