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내과 수의사가 ACVIM이 아닌 AAHA 컨퍼런스를 선택한 이유 : 이태호

시그니처 동물의료센터 이태호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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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부터 19일까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AAHA CON 2026에 다녀왔다. 미국동물병원협회(AAHA)가 주관하는 연례 컨퍼런스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해외학회에 혼자 가는 일정이었다. 가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다. 해외학회는 수차례 다녀 봤지만, 항상 동행자나 지인과 함께였다. 이번에는 등록부터 숙소, 세션 선택, 식사까지 전부 혼자 판단해야 하고 막혔을 때 물어볼 사람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일이 더 부담스러워진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용기를 내었다. 결과적으로 다녀오길 잘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행사장인 포틀랜드 오리건 컨벤션 센터. 도심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시설이 쾌적하였다

평소 진료 외에 맡고 있는 외부 직책이 여러 개 있다. 대한수의사회 학술홍보위원장, 한국동물병원협회 정책기획위원장, 그 밖에 여러 연구회와 협회 이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컨퍼런스와 학회를 참석자가 아니라 개최자, 주관자의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짜고 연자를 섭외하고 강의실을 배정하고 예산을 맞춘다. 행사 당일에는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강의가 잘 돌아가는지를 본다.

그 일이 싫었던 건 아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오랜 기간 채워 놓았던 내 경험과 인사이트가 계속 쓰이기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걸 보는 느낌과 비슷했다. 채움과 비움이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롯이 참석자 신분으로 앉아 있고 싶었다. 해외학회를 고민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국내 학회는 어느 자리에 가도 아는 얼굴이 있고 결국 일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나는 주로 소동물 내과 진료를 본다. 그렇다 보니 해외학회를 고른다면 ACVIM(미국수의내과학회)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가장 먼저 검토한 것도 ACVIM이었다. 그런데 AAHA CON을 선택했다. 미국동물병원협회가 주최하는 학회는 무엇이 다른지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학회는 수의사를 대상으로 한다. 강의도 수의사가 하고 듣는 사람도 수의사다. 하지만 동물병원협회가 여는 컨퍼런스는 대상이 다르다. 수의사뿐 아니라 테크니션, 리셉셔니스트, 사무장, 경영자, 운영자까지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대상이다. 이건 프로그램의 성격 자체를 바꾼다. 임상 강의만으로 모든 프로그램이 채워지지 않는다. 팀 문화, 고객 응대, 인수와 승계, 번아웃, AI 도입 같은 주제가 비슷한 비중으로 들어간다. 한국동물병원협회(KAHA)에서도 해마다 컨퍼런스를 주최하는데,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같은 성격의 행사를 90년 넘게 해 온 곳이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 이것도 해외학회를 미뤄온 이유 중 하나였다. 임상 강의는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용어가 익숙하고 슬라이드에 수치가 나오니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앞뒤로 추측이 된다. 문제는 경영과 운영, 문화를 다루는 강의였다. 평소 쓰지 않는 단어가 계속 나온다. 조직 문화를 설명하는 표현, 협상과 실사에 쓰이는 용어, 감정을 다루는 어휘들이 그렇다. 처음 한두 세션은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컨퍼런스에서 제공하는 실시간 AI 번역 앱을 써봤더니 생각보다 잘 되었다.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강의를 따라갈 수 있었고, 그때부터 임상 강의 외 세션에 들어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아졌다. 이 경험 덕분에 생각이 하나 바뀌었다. 전혀 하지 못하는 일본어나 중국어로 진행되는 학회도 용기를 내서 가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언어가 더 이상 학회 선택의 1차 기준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몸으로 확인했다. 다만 이 앱은 모든 학회가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제공하더라도 전 세션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특정 강의실에서만 되는 경우도 있고 사전 신청을 받는 경우도 있다. 번역 앱을 쓸 생각이라면 등록 전에 주최 측에 제공 여부와 적용 범위를 문의해 두는 것이 좋다. 영어 때문에 해외학회를 미루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다.

첫날 개회식이 인상 깊었다. 신임 CEO 브래디 빌 박사가 5개년 전략 ‘AAHA 2031’을 발표했다. 회원 500명 설문과 이사회 설문, 심층 인터뷰와 워크숍을 거쳐 만들었다고 했고 방향은 거래 중심에서 관계 구축 중심으로의 재정렬이었다.

강의실로 올라가는 로비. 배너와 안내 데스크를 한 동선에 모아두어서 처음 온 사람도 헤매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다음이 놀라웠다. 전임 회장이 무대에 올라 자신이 극단적 선택을 떠올렸던 시기를 이야기했다. 가장 큰 멘토였던 분이 겉보기에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였음에도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공유했고, 본인 역시 2017년 내슈빌에서 열린 AAHA 행사 중에 극단적인 위기를 겪었다고 고백했다. 학자금 대출과 업무량, 가면 증후군, 상실의 무게, 왜곡된 공개 리뷰를 직역의 고통 요소로 꼽으면서 수의사가 다른 직군보다 극단적 선택의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강함은 침묵에 있지 않는다”, “I see you, I hear you, you matter here(당신을 본다, 당신의 말이 들린다, 당신은 이곳에서 소중한 사람이다)”로 정리했다.

기조강연도 형식이 달랐다. 연자가 수의사가 아니라 사회학자이자 작가였고, 62살에 백내장으로 실명해 벽을 더듬고 손으로 먹이를 받아먹던 안데스 콘도르(남미 안데스산맥에 사는, 날개를 펴면 3미터가 넘는 대형 맹금류다) ‘프린세스’가 수술로 시력을 되찾아 다시 날게 되었고 72살인 지금까지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참석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2분간 서로의 경험을 나누게 했다. 1시간 반을 토크쇼처럼 끌고 갔다. 기조강연 시간에는 다른 강의를 아예 배치하지 않아 참석자 대부분이 기조강연을 듣는 것 같았다.

기조강연장. 강의실 의자가 아니라 원형 테이블로 배치했는데, 마지막에 둘씩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게 하려는 구성이었다. 이 시간에는 경합하는 강의를 두지 않았다

AAHA 인증 이야기는 사흘 내내 각도를 바꿔가며 계속 나왔다. 컨설턴트가 인증 동물병원을 직접 방문해 관찰하고 우수 사례를 추천한다. 위원회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를 정하고 개회식에서 영상과 함께 공개한 뒤 마지막 날 우승자를 발표한다. 로비에는 25년, 50년, 75년 인증을 유지한 병원 명단이 이젤로 세워져 있었다. 인증을 유지한 기간 자체가 성과로 전시되고 있었다.

로비 한쪽 벽면에 이젤을 줄지어 세우고 25년, 50년, 75년 인증을 유지한 병원 명단을 붙여두었다. 인증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유지했는지를 성과로 전시하는 방식이다

인증이 실제로 자산으로 작동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병원 인수를 다룬 세션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AAHA 인증은 체계적인 정책과 운영 절차의 증빙으로 작동해 인수 협상의 지렛대가 되고 인증 병원은 보험 청구율이 가장 낮다는 통계가 있어 보험사와의 협상에서도 유리하다고도 했다.

병원 인수를 다룬 세션. ‘매수자 입장에서는 가치 평가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제목 아래 인증과 운영 기록이 협상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어떤 세션에 참석할지 고민하면서 프로그램 책자를 넘기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내가 임상을 시작하던 무렵의 학회에서는 보기 힘들던 주제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통증 관리, 임종 전 돌봄과 안락사, 노쇠(Frailty), 그리고 AI 등이다. 예전에는 통증이 수술 마취의 부록처럼 다뤄졌고, 임종은 강의주제라기보다 각자 알아서 감당하는 일에 가까웠다. 노쇠라는 말은 진료 기록에 쓰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각각 여러 세션에 걸쳐 편성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사실상 독립된 트랙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반려동물이 오래 살게 되면서 마지막 구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실제 진료의 문제가 되었고, 통증과 노쇠는 그 구간을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최근 국내 학회도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왔는데, 이번에 보니 속도는 저쪽이 조금 앞서 있었다.

AI 관련 세션이 여러 건 있었는데 결론이 비슷했다. 기존 진료 방식을 그대로 둔 채 속도만 올리면 생산성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근거로 든 비유는 다음과 같다. 1899년 공장에 전기 모터가 들어오기 시작해 24년 만에 채택률이 5% 미만에서 70%까지 올랐는데 생산성 향상은 5%에 그쳤다는 것이다. 벨트와 샤프트로 얽힌 구식 공장 레이아웃을 그대로 두고 동력원만 바꿨기 때문이다. 레이아웃 자체를 재설계하고 조립 라인을 도입한 뒤에야 제작 시간이 13시간에서 90분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AI 스크라이빙이 딱 그 전기 모터 단계라는 지적이었다.

전화 업무를 그 예로, 숫자로 설명해 주었다. 동물병원 인바운드 전화의 약 80%가 재예약이나 서류 요청 같은 행정 업무이고, 특히 일반 진료 기준으로는 그 수치가 무려 90% 이상이며 실제 의료 관련 통화는 10% 미만이라고 한다. 또한 볼티모어가 비긴급용 311 번호를 분리했더니 911 통화량이 25% 줄고 응답 시간이 6초에서 2초로 단축됐다는 사례를 들면서 병원 전화도 같은 구조라고 설명했다. 온라인 예약과 결제, 약국, 문진표 같은 링크 100개 이상을 지식 베이스에 넣었더니 관련 통화의 20%가 링크 문자 전송만으로 해결됐다는 사례도 소개하였다.

동시에 조건도 분명히 했다. 환각을 막으려면 병원 의료 기록에 근거한 그라운딩이 필수이고, 음성 합성이 사람과 구분되지 않을수록 AI 사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AI와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는 보호자를 즉시 사람에게 연결하는 우회 경로도 필요하다고 했다. 도입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원칙부터 정리하는 게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시간 되찾기’를 다룬 운영 세션. 강의실을 원형 테이블로 구성하여 옆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두었다

안락사 전 12개월 이내에 진료받은 기록이 없는 경우가 고양이 55%, 개 45%라고 한다. 보호자 5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다. 병원이 가장 취약한 시기의 환자를 조용히 잃어버리고 있다는 뜻이다. 안락사 이후도 비슷했다. 다른 반려동물이 있는데도 14%에서 20%의 보호자가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중 75%는 안락사 과정 자체에는 불만이 없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이라는 공간에 남은 정서적 낙인 때문이었다.

임종 진료 세션에서 나눠준 스티커.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여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마지막 장이 가장 중요하다’, ‘삶의 끝은 시작만큼의 돌봄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연자는 노령기 관리를 훨씬 앞에서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성견과 성묘기에서 노령기, 노쇠기, 임종기로 전환점을 미리 정의해 두고 보호자를 계속 교육하라는 것이다. 아프기 전에 여러 제형의 사료를 경험시키고 약물 투여와 램프 적응을 긍정적인 훈련으로 미리 시켜 둔다. 노쇠 판정도 진료실에서 바로 잴 수 있는 지표로 단순화되어 있었다. 신체충실지수(BCS)와 근육상태점수(MCS), 이동성, 활동 수준, 피로감 다섯 가지 중 3개 이상이면 노쇠로 보고, 노쇠한 개는 6개월 내 사망 위험이 약 5배 높다는 연구 결과가 근거였다. 인지와 통증, 삶의 질 척도를 각각 하나씩 정해 모든 환자에게 일관되게 적용하라는 조언이 가장 현실적이었다. 도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마다 다르게 쓰고 있어서 비교가 안 되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노쇠 증후군 세션의 슬라이드. 사람 노인의학의 노쇠 개념을 진료실에서 바로 잴 수 있는 지표로 옮긴 연구들을 하나씩 짚었다

고양이 췌장염 세션에서는 연자가 시작하자마자 “제가 정말 싫어하는 질환”이라고 했다. 부검한 고양이의 60%에서 조직병리학적 췌장염 소견이 나왔지만, 대부분은 췌장염으로 죽은 것도, 생전에 진단받은 것도 아니었다는 연구를 근거로 과소 진단과 과잉 진단이 동시에 일어나는 질환이라고 했다. 아밀라아제는 진단에 가치가 전혀 없다고 못 박았고, 증상이 모두 맞는데 fPL이 정상이면 가능성은 낮아지지만 배제되지는 않으며 그 경우에도 처치는 똑같이 한다는 대목이 실무적으로 와닿았다.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사료 그릇에 늘 세 알을 남기던 고양이가 오늘은 여섯 알을 남겼다”는 수준의 변화를 보호자는 감지하니, 검사에서 이상이 없어도 그 직관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고양이 췌장염 세션. 연자가 마지막 슬라이드에 자기 이메일 주소를 띄워놓고 질의응답을 받았는데, 강의가 끝난 뒤에도 질문이 길게 이어졌다

통증 서비스 개설을 다룬 세션에는 임상과 경영을 동시에 다루었다. 2021년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신경과·통증 전문 클리닉 사례였는데, 신경과 전문의가 진단을 세우고 통증 관리 전문가가 그 위에 환자별 프로토콜을 설계한 뒤 다시 전문의의 검토와 승인을 거쳐 실행하는 구조였다. 경막외 스테로이드 주사와 관절 주사, 27게이지 바늘로 국소 주사하는 메조테라피, 정맥으로 약물을 지속 주입해 통증 시스템 자체를 리셋하는 ‘Pain vacation’까지 술기가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연자가 자신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지를 이유와 함께 그대로 밝힌 대목도 있었다.

침술은 10년 전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통증 증후군에 유효한 도구로 쓰고 있다고 했고, 반대로 레이저 치료는 시판 장비의 강도가 충분하지 않고 효과를 입증한 연구 대부분이 해당 업체의 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직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초기 상담 375달러, 재진 180달러, 침술 세션 153달러처럼 본인 병원의 진료비를 공개했다.

행동 정신약리학 세션은 약물 각론이 아니라 구분에서 출발했다. 보호자가 싫어하는 행동이지만 특정 발달 단계에서는 정상으로 간주되는 뛰어오르기나 리드 당김 등의 행동과, 공포·불안·공격성·반복행동처럼 정서적 이상에 해당하는 행동 문제를 먼저 나누고 후자를 약물 대상으로 삼는다. 보호자가 “갑자기 물었다”고 하는 경우도 대부분은 신체 언어나 상황적 트리거를 오독한 결과라고 했다.

진단 도구는 선행 사건과 행동, 결과를 구조적으로 보는 ABC 분석이었고, 이것만으로 5분 안에 치료 계획의 틀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치료는 세 단계로 제시됐다. 유발 요인을 차단하는 관리가 첫 단계이다. 그다음이 훈련과 행동 수정이고, 약물은 세 번째다. 약물에만 의존하는 것은 동물과 보호자 모두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지 요법은 효과를 보이는 최소 용량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고 1차 선택은 플루옥세틴, 사회적 불안이 중심이면 설트랄린이다. 파록세틴은 요정체 위험이 있어 특히 고양이의 배뇨를 살펴야 하고, SSRI 계열은 발작 역치를 낮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4~6주에 평가해 개선이 없으면 증량하고 다시 3~4주 뒤에 판단한다.

상황별 단기 요법에서는 트라조돈을 2~7mg/kg로 상황 2시간 전에 쓰되 24시간 총 15mg/kg를 넘기지 말 것, 가장 흔한 병용 조합이 가바펜틴과 트라조돈이라는 것, 고양이의 이동과 내원 불안에는 프레가발린이 승인되어 있다는 것을 정리했다. 저혈압 위험 때문에 실레오와 클로니딘, 아세프로마진과 실레오, 아세프로마진과 클로니딘은 함께 쓰지 않는다. 모니터링은 보호자에게 1점에서 10점 척도로 행동 심각도를 보고받는 방식이고, 1~2단계 개선도 임상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다만 이 강의는 미국의 오프라벨 사용 규정과 수의사-보호자-환자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국내에서 같은 내용을 적용하려면 허가 약물 상황과 기록 요건은 우리 기준으로 다시 확인해야 하겠다.

행동 정신약리학 세션. 약물 각론보다 처방을 할지 말지를 무엇으로 판단하는가에 시간을 더 썼다

강의 구성 방식도 눈에 들어왔다. 응급 천자술 세션은 흉강과 복강, 심낭 천자에 위 감압과 기도 세척까지 묶어 압박 속에서 바늘을 찌른다는 하나의 상황으로 구성했다. 발치 세션은 마지막에 오늘 병원에 돌아가서 할 일을 목록으로 정리해 주었는데, 치아 모델 구매와 기구 연마, 루페 맞춤 제작, 치과 전용 동의서 작성처럼 그날 바로 할 수 있는 항목들이었다. 교과서적 총론을 나열하는 대신 임상의가 실제로 헤매는 지점을 강의의 핵심으로 삼는 방식이다.

응급 천자술 세션. 흉강·복강·심낭 천자에 위 감압과 기도 세척까지 묶어 ‘압박 속에서 바늘을 찌른다’는 하나의 상황으로 구성했다

진행 형식에서도 하나 배웠다. 팀 신뢰를 다룬 워크숍은 두 연자가 번갈아 강의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무대에 서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진행했다. 한 사람이 개념을 던지면 다른 사람이 현장 경험으로 받고 다시 질문으로 넘긴다. 신뢰라는 주제를 두 사람의 대화로 시연하는 셈이었다. 사전 설문 데이터와 워크시트, 30일 실행 계획, 여섯 세션을 하나로 묶은 구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사흘 중 설계가 가장 정교한 강의였다.

팀 신뢰 워크숍. 두 연자가 번갈아 서는 게 아니라 나란히 서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강의를 진행하였다

전시장 운영도 눈여겨봤다. 점심을 전시장 안에서 뷔페로 제공했다. 배식 라인을 여러 곳으로 나눠서 줄이 몰리지 않았고 식사가 여유로웠다. 식사 공간과 부스가 같은 홀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부스 앞에 머물게 된다. 부스 자체는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출했고,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 컨퍼런스에서 보는 크고 화려한 부스와는 대비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머물며 대화하는 시간은 길었다. 부스의 규모보다 사람이 머물 이유를 만드는 프로그램 구성이 실제 상담으로 이어진다는 걸 확인했다.

점심은 전시장 안에서 뷔페로 제공했다. 배식 라인을 여러 곳으로 나눠 줄이 한곳에 몰리지 않았고, 식사 테이블과 부스가 같은 홀에 있어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부스로 옮겨가게 된다
전시 부스가 늘어선 모습이다. 한국이나 중국 컨퍼런스에서 보던 크고 화려한 부스와 달리 규모가 작고 단출했는데, 사람들이 앞에 머물며 대화하는 시간은 오히려 길었다

작은 장치들도 계속 눈에 띄었다. 후원사가 제공한 물병의 QR 코드를 스캔하면 기부가 되고, 컨퍼런스 앱을 설치하면 내년 행사 무료 등록 경품에 응모된다. 후원사 세션에 등장했던 사스콰치 인형탈을 전시장 곳곳에서 찾는 이벤트도 있었다.

후원사 세션에 등장했던 사스콰치 인형탈. 세션에서 끝내지 않고 전시장 곳곳에 등장시켜 찾아다니는 이벤트로 확장했다. 나도 결국 찾아서 같이 한 장 찍었다
로비에 세워둔 후원사 감사 배너. 부스를 낸 업체 이름을 크기 구분 없이 한 판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운영 인력이 로고가 들어간 단체복을 입고 있는 것도 좋았다. 참가자 입장에서 누구에게 물어보면 되는지가 옷만 보고 바로 구분된다.

반가운 장면도 있었다. 응급 천자술 세션에서 기흉 진단 기준의 근거로 인용된 논문 중 하나가 국내 연구진의 것이었다. Usefulness of transthoracic lung ultrasound for the diagnosis of mild pneumothorax, J Vet Sci 2018년 논문이다. 경미한 기흉 진단에서 폐 초음파 민감도가 88.8%, 흉부 방사선은 66.6%라는 수치가 화면에 떠 있었다.

응급 천자술 세션에서 기흉 진단의 근거로 띄운 슬라이드. 경상국립대학교 황태성 교수님이 제1저자인 J Vet Sci 2018년 논문으로, 경미한 기흉에서 폐 초음파 민감도 88.8%, 흉부 방사선 66.6%라는 수치를 강의 중 인용하였다

제1저자가 경상국립대학교 황태성 교수님이셨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렸더니, reverse sliding sign이 경미한 기흉에서만 확인되고 특이도는 100%였다는 내용의 졸업논문이었다는 답을 받았다. 본인도 미국 협회 컨퍼런스에서 자기 논문이 인용되는 장면을 보고 기뻐하셨다. 국내 수의학 연구가 해외 컨퍼런스의 임상 판단 근거로 실제 쓰이고 있다는 걸 화면으로 직접 보니 느낌이 달랐다.

마지막 날에는 AAHA CEO와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쳐 짧게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고 첫날 연설이 인상 깊었다는 말을 전했더니 멀리서 와줘서 고맙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공식 면담도 아니고 대단한 자리도 아니었지만, 협회 CEO가 복도에서 참가자와 격의 없이 대화하는 구조 자체가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 날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AAHA CEO 브래디 빌 박사.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멀리서 와줘서 고맙다며 반갑게 사진에 응해주었다

처음에 적었듯이 아는 사람 없이 해외학회에 혼자 가는 일은 생각보다 부담이었다. 하지만 사흘을 다 채우고 나니 뿌듯했다. 대단한 지식을 얻어서가 아니라 미뤄왔던 일을 결국 해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한 수의사와 수의대생에게 몇 가지 남기고 싶다.

첫 번째, 혼자 가도 괜찮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는 건 생각해 보면 갈 이유가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나도 이번에 처음 해봤다.

두 번째로 영어는 예전만큼 큰 장벽은 아니다. 임상 강의는 용어가 익숙해서 생각보다 따라갈 수 있고 어려운 세션은 AI 번역이 상당 부분 메워준다.

세 번째는 자기 전공이나 관심 분야 학회만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내과를 주로 보지만 이번에는 동물병원협회가 여는 컨퍼런스를 골랐고 진료실에서는 얻지 못했을 것들을 얻어 왔다. 지금 내가 무엇을 채우고 싶은지가 기준이 되면 선택지가 넓어진다. 계속 쓰이고만 있다면 채울 시간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나에게는 이번 사흘이 그 시간이었다.

2027 AAHA CON은 2027년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메릴랜드주 내셔널하버에서 열린다. 고민 중인 사람이 있다면 한번 다녀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데일리벳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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