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가 흔든 동물병원 치료순응도- 보호자는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

마케터 조르디 기고


10
글자크기 설정
최대 작게
작게
보통
크게
최대 크게

진료실에서 처방을 다 듣고 나간 보호자가 집에 가서 AI(인공지능)와 다시 상의한다. 그리고 약 용량을 스스로 줄이거나, 수의사가 권고한 재검진 일정을 미루거나, 심지어 다음 진료에서 처방 자체를 재고해달라고 요청하는 시대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AI를 미리 찾아보고 수의사의 답이 그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려는 보호자, 그리고 그런 보호자를 상담할 때 위축감을 느낀다는 수의사의 목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다.

이런 보호자들을 ‘요즘 더 유난스러운’ 보호자들로 치부하기 쉽지만, 사실은 치료 순응도가 낮은 보호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 환자 혹은 보호자가 의료진의 권고를 얼마나 충실히 따르는지를 ‘치료 순응도(Adherence)’라 부른다. 치료 순응도 개념이 AI를 만나 병원 현장에서 전보다 훨씬 크게 흔들리고 있다.

치료 순응도는 30년 넘게 연구되어 온 주제다. 미국동물병원협회(AAHA)는 2003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연구를 발표했는데, 정작 수의사들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치료 순응도 수준이 훨씬 낮다는 결과가 나와 관련 업계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이후 순응도 측정 도구가 개발되기도 했다. 다만, 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개념과, 임상 현장에서 실제로 관리 가능한 지표로 다뤄본 경험은 전혀 다른 얘기다.

그동안 보호자의 치료 순응도가 낮은 이유는 대체로 뻔했다. 깜빡했거나, 번거로웠거나, 경제적으로 부담됐거나. 그런데 지금은 이 실패의 결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AI가 진료실 권고와 상반된 정보를 줘서 보호자가 아예 권고를 따르지 않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AI가 애매한 정보를 얹어 보호자가 확신 없이 절반만 따르는 경우다. 전자는 눈에 띄어서 대응이라도 하지만, 후자는 겉으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놓치기 쉽다.

여기에 두 가지 흐름이 겹친다. 하나는 반려동물의 고령화다. 국내 동물등록 데이터 기준으로 9세 이상 반려견 비율은 2021년 이미 40%를 넘어섰고, 최근 조사에서는 응답 가구의 절반 이상이 8세 이상, 38.3%가 10세 이상의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발성 처치보다 만성질환 관리와 장기적인 사후관리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른 하나는 생성형 AI의 보편화다. 2026년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반려동물의 정서적 스트레스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챗GPT 등 AI 도구를 활용한다고 답한 보호자가 개는 23%, 고양이는 20%에 달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률이 높은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이 비율은 더 높을 것으로 봐야 한다. 관건은 정보량이 아니다. 그 정보가 진료실 권고와 부딪힐 때 보호자가 어느 쪽을 따르느냐, 그게 곧 치료 순응도다.

이 지점에서 참고할 만한 연구가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 지역의 반려동물 진료 현장에서 수의사가 애매하게 권고했을 때보다 명확하게 권고했을 때 보호자가 그 권고를 따를 가능성이 약 7배 높게 나타났다(오즈비 기준). 또한 순응도가 높은 보호자일수록 진료 만족도도 높았고, 수의사와의 관계가 협력적일수록 순응도 자체가 함께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순응도 저하는 드문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순응도 측정 도구(Lincoln Adherence Instrument Record) 연구에서는, 여러 요인 중에서도 임상의의 조언에 대한 신뢰가 치료 성공 여부와 유의미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의 분야에서는 이 신뢰 격차가 수치로도 확인된다. 미국 소비자 대상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4%는 여전히 챗GPT보다 담당 의사의 조언을 더 신뢰한다고 답했으며, 챗GPT를 완전히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2%에 그쳤다. AI가 아무리 보편화돼도, 신뢰의 저울추는 결국 사람 쪽으로 기운다는 뜻이다.

결국 순응도는 정보의 양이나 정확도보다 신뢰와 관계의 문제에 가깝다. AI가 정보는 줄 수 있어도, 그 정보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가르는 신뢰 관계까지 대신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역설적으로 이 지점이 수의사의 자리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AI가 대체하는 것은 정보이지, 관계가 아니다. 다만 그 관계를 의식적으로 관리하는 동물병원과 그렇지 않은 동물병원은 갈리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진료실을 나선 보호자가 집에서 다시 AI 챗봇을 켤 때, 손에 남은 건 대개 메모 몇 줄, 그마저 없다면 흐릿해진 기억뿐이다. 처방 용량이 정확히 얼마였는지, 재검진이 2주 후였는지 3주 후였는지, 수의사가 낙관적으로 말했는지 신중하게 말했는지조차 헷갈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건 보호자가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받은 설명이 집까지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적 공백에 가깝다. 보호자가 챗봇에 다시 묻는 행동은 무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바로 이 공백을 메우려는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이다.

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국내 EMR 업체인 플러스벳이 이 지점을 정면으로 겨냥한 기능을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진료 중 오간 권고를 사람이 따로 받아 적을 필요 없이 구조화된 데이터로 남기고, 보호자가 필요할 때 그 기록을 다시 열어볼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식이다. 앞서 짚었듯 순응도를 가르는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관계다.

문제는 그 관계가 진료실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보호자의 기억이라는 불안정한 매체에 전적으로 맡겨진다는 점이다. 기록은 이 관계를 대체하는 장치가 아니라, 진료실 안에서 만들어진 신뢰가 진료실 밖에서도 끊기지 않도록 이어주는 연장선에 가깝다. 수의사의 권고가 흐려지지 않고 보호자 손에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기억을 되짚기 위해 챗봇을 다시 열어야 할 이유도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순응도와 재진율의 직접적 상관관계를 증명한 국내 연구는 아직 없다. 다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순응도가 높을수록 만족도가 높고, 만족도 높은 고객이 병원에 더 자주 더 오래 머문다는 것은 이미 업계에서 통용되는 사실이다. 순응도, 만족도, 재진율, 이 셋은 서로 다른 지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AI가 반려동물 보호자의 정보 판단에 깊숙이 개입하는 지금, 순응도는 더 이상 진료실 안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라포와 설명의 영역, 다시 말해 수의사 개인의 역량으로만 여겨져 왔다면, 이제는 병원 차원에서 측정하고 관리해야 할 지표로 다뤄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 동물병원은 보호자의 순응도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 그 답을 우연에 맡기고 있는가, 관리하고 있는가.

마케터 조르디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시장을 읽는 B2B 마케터 조르디, 사용자 경험에서 출발한 고민을 인사이트로 풀어냅니다.

데일리벳 관리자
Loading...
파일 업로드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