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수의테크니션 제도화① 일자리 창출이냐 나눠먹기냐


0
글자크기 설정
최대 작게
작게
보통
크게
최대 크게

수의테크니션 제도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제도화 필요성을 주장하는 언론기사로 시작된 사태는 ‘일자리 창출’을 내세운 정부가 이어 받아 가속 패달을 밟고 있다. 수의사 내부에서도 찬반의견이 갈등으로 번지고, ‘자가진료 제한과 테크니션 제도화를 주고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올 연말까지 제도화를 추진하겠다는 정부 입장을 보면, 관계자들의 갑론을박과 관계없이 결과의 방향이 정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때 인터넷에 유행했던 표현인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제도화 도로에 과속방지턱을 세우고 속도를 늦춰볼 필요가 있다. 출발선이 맞았는지,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역주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봐야 사고를 막을 수 있다.

 

국내 진료시장은 수의테크니션 제도화를 요구하는가

농림축산식품부는 수의사법 개정을 통한 수의테크니션 제도화로 3천여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 입장에서 제도화 추진의 주목적은 반려동물 보건향상이나 동물복지 개선이 아닌 ‘일자리’에 있다.

이미 동물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보조인력의 업무범위를 변경하는 것이 과연 ‘창출’인지도 논쟁거리지만, 애초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정부나 법령의 역할이 아니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시장과 기업이다. 시장에서 어떠한 서비스가 새로이 등장하거나 크게 증가하여 기존의 직업으로는 커버하기 어려울 때 새로운 직업이 탄생한다.

지금은 사회통념으로 자리잡은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분담도 ‘넘치는 진료수요를 의사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의학적 판단과 처치행위로 구성되는 진료 중에서, 다년간의 전문교육과 임상경험이 필요한 의학적 판단 능력은 의사만이 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처치행위 중 위임할 수 있는 최소 범위를 정해 간호사에게 맡긴 것이다.

즉 수의사와 수의테크니션의 역할분담을 제도화하는 문제도 ‘반려동물 진료수요를 수의사만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진료시장의 요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요구의 주체는 수의사여야 한다.

그러나 해마다 반려동물 임상수의사 포화문제를 거론하는 수의계를 되돌아보면, 과연 그러한 요구가 있는지 의문이다.

 

해외 선진 진료환경의 단순 적용은 지양해야

제도화 속도를 키운 계기가 된 언론 보도에서는 ‘미국에서 8만명의 수의테크니션이 일하고 있으니, 한국 정부도 길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미국애완동물산업협회(APPA)와 미국 노동부(USDL)에 따르면, 미국 내 반려동물은 1억 8천만마리, 수의테크니션은 9만 5천명으로 추산된다. 반려동물 1,900여마리 당 1명의 테크니션이 활동하는 것이다. 반려동물 임상수의사는 5만6천명(미국수의사회, 2015년 기준)으로 반려동물 3,200마리당 1명 수준이다.

국내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반려동물은 500만마리 내외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의 비율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약 2,600명의 수의테크니션이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 반려동물 임상 환경을 고려하면 이 같은 예측은 설득력을 잃는다.

국내 반려동물 임상수의사를 4천명으로 낮춰 계산해도 1300마리당 1명 수준으로 미국에 비해 2.4배나 포화되어 있다. 실질적으로는 미국에 비해 수의사가 더 많다는 것. 그만큼 테크니션에 진료행위 일부를 위임해야 할 필요성이 적다는 것이다.

백신접종 등 예방의학이 일선 동물병원 업무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에 비해, 자가진료 등의 부작용으로 관련 진료가 적어진 국내 동물병원 환경도 비교 요인이다.

 

인턴수의사를 위협하는 제로섬 게임

인턴수의사와의 연관성도 추가적인 고려대상이다.

제도화 추진 시 테크니션에게 주어질 처치행위(주사, 채혈, 입원관리 등)는 현재 수의사가 담당하고 있다. 담당 진료수의사가 직접 처치하거나, 대형동물병원의 경우 인턴수의사에게 맡기는 형태다.

테크니션 제도화가 새로운 고용창출로 이어지려면 이러한 처치 업무 자체가 늘어나거나, 테크니션이 덜어준 처치업무 부담이 신규진료로 곧장 이어질 수 있는 시장상황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제도화는 일자리 ‘창출’이 아닌 ‘나눠먹기’에 그칠 수 밖에 없다. 테크니션을 고용하는 만큼 인턴수의사 등의 고용은 줄어드는 제로섬 게임이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은 국내 반려동물 임상수의사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설문에 참여한 동물병원 임상수의사 2,400명 중 76%가 테크니션 제도화로 인해 인턴수의사 등의 고용이 줄어들 것이라 전망했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새로이 진료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임상수의사에게는 불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만큼 수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예비수의사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한다.

 

이 밖에도 테크니션 제도화가 반려동물 고용시장에 미칠 영향은 다양하다. 이해관계자별 찬반도 갈린다. 진료권의 위임을 다루는 것인만큼 수의계 내부의 공론화 및 의견교환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건너뛰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답정너’식 제도화를 추진한다면 거센 반발과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자가진료 제한 추진과의 연관성을 다룰 2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자주.

 

데일리벳 관리자
Loading...
파일 업로드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