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정부는 개별 동물병원의 진료비를 전수 조사하여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려동물 보호자의 알 권리와 합리적인 선택권을 보장하겠다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충분한 제도적 기반과 객관적 비교 기준도 마련하지 않은 채 개별 병원의 진료비를 공개하는 것은 보호자는 물론 동물의료체계 전체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한국동물병원협회는 준비되지 않은 개별 병원 진료비 공개 추진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현행 동물진료비 공시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동물진료비 공시제는 시행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정확성과 실효성에 대한 지적을 받아왔다.
동일한 진료항목이라 하더라도 동물의 품종, 체중, 연령, 질병의 중증도, 사용되는 약제와 재료, 마취 여부, 검사 범위 등에 따라 진료 내용과 비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의 가격으로 단순 비교하도록 만든 현행 공개 방식은 실제 의료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보호자에게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진료항목 표준화 없이 가격만 비교하는 현재의 공시 방식은 정책 시행 당시부터 여러 전문가가 우려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기는커녕,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병원의 진료비를 전수 조사하여 공개하는 정책까지 추진하고 나섰다. 부정확한 제도를 바로잡지 않은 채 공개 범위만 확대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를 더욱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의료서비스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동물의료의 가치는 가격표 하나로 평가될 수 없다. 의료진의 경험과 전문성, 병원의 진료역량, 사용하는 장비와 의료기술, 응급대응체계, 감염관리 수준, 사후관리 등 의료의 질을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는 비교 대상에서 제외된 채 오직 가격만 공개된다면 보호자는 왜곡된 정보를 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가격만으로 병원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환경은 저가 경쟁을 부추길 수 있으며, 이는 의료서비스의 질 저하와 필수 의료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보호자의 선택권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부가 진정으로 보호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부실한 공시제부터 손 보는 것이다.
진료항목의 표준화와 명확한 조사 기준을 마련하고, 동일한 의료행위가 동일한 기준으로 조사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조사자료의 정확성을 담보할 검증 절차도 마련되어야 하며, 보호자가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제공 방식도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반 없이 개별 병원의 가격만 공개하는 것은 정책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보호자에게도 잘못된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국동물병원협회는 정부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준비되지 않은 개별 동물병원 진료비 공개 추진을 중단하라.
둘째, 수년간 지적되어 온 현행 동물진료비 공시제의 정확성과 실효성 문제부터 개선하라.
셋째, 가격 중심의 단순 비교가 아닌 의료의 질과 전문성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동물의료 정책을 마련하라.
동물의료는 생명을 다루는 전문 의료서비스이다. 보호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보장하는 길은 단순한 가격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의료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만드는 데 있다.
정부는 보여주기식 가격 공개 정책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동물의료의 본질을 지키는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
2026년 8월 8일 한국동물병원협회(KAHA) 회장 최이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