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졸속 도입’ 동물병원 진료비 전수 공개, 저가 경쟁·규제 폭주 우려된다

사람 비급여 정책 실패 답습..다음은 수술비·매출 공개 수순인가


4
글자크기 설정
최대 작게
작게
보통
크게
최대 크게
의료기관별 가격을 공개하는 사람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제도.
동물병원도 이렇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병원서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 확대‥강 건너 불 아니다”라는 기사를 작성한 것이 2018년 4월이었다. 그 불은 결국 강을 건너왔고, 비슷하게 옮겨 붙고 있다.

2023년 동물병원에 도입된 진료비 공시제는 매년 강화됐다. 공개 대상인 진료항목은 10개에서 20개로, 의무 공개 대상은 모든 동물병원까지 차례로 확대됐다. 그나마 지난해까지는 전수조사된 비용을 통계처리해 지역별 대표값(최저·최고·평균·중간 비용)만 공개했지만, 올해부터는 개별 병원의 항목별 단가를 각각 전수 공개할 예정이다.

지역별 대표값을 공개하는 것과 개별 병원의 단가를 공개해 줄세우기식 가격 비교를 유발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병원의 잠재고객에게 전자는 참고자료일 뿐이지만, 후자는 직접적인 선택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규제 당사자인 동물병원 대부분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 올해 진료비 조사 시작과 함께 이미 정해진 방침을 통보받았다. 조사에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도 없다.

현재 공개 대상인 항목 중 ▲백신비 ▲심장사상충 예방비 ▲외부기생충 예방비 ▲광범위 구충비는 그 자체로 완결된 비용에 가깝다. ‘올해 종합백신은 어디서 할까’를 고민하는 보호자는 주변에 보다 저렴한 병원이 어딘지 검색해볼 수도 있다. 그만큼 개별 동물병원의 단가가 전수 공개되면 가격 비교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

반면 ▲혈액검사 ▲엑스레이 ▲초음파 검사 ▲초·재진료 ▲입원비 등은 전체 진료의 일부를 차지하는 구성요소에 가깝다. 이들 단가를 동물병원별로 안다 한들, 아픈 내 강아지를 데려갔을 때 얼마나 비용이 나올 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줄세우기를 피하기 어렵다. 보호자들은 전수 공개된 가격을 기준으로 ‘대체로 비싼 병원’, ‘대체로 저렴한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할 것이다. 의료 인프라의 질, 의료진의 숙련도, 응급이나 과목별 진료 체계 등 단가표에 담기 어려운 가치는 배제된다. 질적 경쟁보단 소모적인 저가 경쟁을 유발하는 방향이다.

*   *   *   *

동물병원 진료비의 사전 게시, 공시제 도입은 사람의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제도와 궤를 같이 한다.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제도는 이미 개별 의료기관별 비용을 공개해왔으니, 동물병원에도 ‘언젠가는 개별 병원의 비용을 전수 공개하겠지’라는 추정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도입 과정에는 행정편의주의적 조급함이 짙게 배어난다. 현장으로부터 충분한 의견수렴도, 준비 작업도 없었다. 예산 수립 단계에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전수 공개가 4월 무렵부터 갑자기 거론됐다.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지난해 조사해둔 로우데이터를 그냥 바로 전수 공개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대신 올해 조사 결과를 전수 공개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조사가 개시된 현재도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어떻게 공개할 지조차 불분명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모르겠다. 개별 동물병원에게 강제적인 가격 비교는 생업에 직결되는 문제인데, 정부에게는 그냥 대충 되는대로 하면 될 일 정도인가 보다.

지원과 규제의 불균형도 고질적이다. 전문의 제도를 도입하겠다, 동물의료법을 만들겠다 말만 늘어놨을 뿐 동물의료개선종합대책은 아직 구체적인 청사진도 없다. 3년 넘게 ‘세월아 네월아’다. 그런데도 이런 진료비 규제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졸속으로 해치운다. “도와주는 것 없이 괴롭히기만 한다”며 일선 원장들의 반감이 큰 것도 이해가 간다.

*   *   *   *

동물병원 진료비 관련 규제가 이번 전수 공개로 끝날리도 없다. 사람의 비급여 진료비 규제만 따라가고 있으니, 다음 규제가 어디로 향할 지 가늠해볼 수도 있다.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제도에서는 치과임플란트나 도수치료, 시력교정술(라식·라섹) 등이 공개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향후 동물병원에서도 검사가 아닌 치료행위까지 공개 대상이 확장될 수 있다. 혹 중성화수술비나 슬개골탈구수술비가 포괄수가적인 성격으로 전수 공개된다면, 진정한 가격비교 시장의 서막이 열릴 것이다.

보고 내용도 더 심화될 수 있다. 현재 의료기관은 비급여 진료의 단가뿐만 아니라 진료 건수와 매출 등 세부 내역까지 모두 보고하고 있다. 의원급은 매년 3월에, 병원급은 3·9월에 각각 보고한다. 이를 기반으로 2024년 3월 기준 도수치료는 1,208억 원, 상급병실료 1인실은 523억 원 등 구체적인 매출 규모 산출이 가능했다.

동물병원에도 이 같은 세부 보고 규제가 도입되지 말란 법이 없다. 가령 이달의 혈액화학검사를 몇 건 실시했는지, 그로 인한 매출이 총 얼마인지 보고하게 만드는 식이다. 개별 병원의 행정부담은 그만큼 커지고, 개별 병원의 매출이 속속들이 공개된다는 점도 문제가 되겠지만, 이제껏 정부가 밀어붙인 방식을 보면 별로 신경쓸 것 같지는 않다.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은 “진료비를 공개해서 가격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반려동물 진료비 부담 문제를 묻는 대통령의 질문에 답하면서다. 단가 공개로는 비용 부담 상승을 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사람의 비급여 시장에서 증명됐는데도 말이다.

이번 전수 공개로 ‘진료비 부담이 완화됐어요’라는 시장 반응이 나올 가능성은 만무하다. 그러니 더 걱정이다. 공개 대상을 늘리든, 공개 강도를 높이든 잘못된 방향으로 더 폭주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람의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제도는 꾸준히 강화됐지만, 비급여 진료비 부담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자료 : 국민건강보험공단)
데일리벳 관리자
Loading...
파일 업로드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