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무의 생명 이야기④] 애완동물 반려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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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칼럼] 박종무의 생명 이야기④ – 애완동물 반려동물

1990년대 이후 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1998년도에 사육되던 동물은 137만 마리였는데 2002년에는 약 198만 마리로 늘어났다. 또 2010년에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의하면 약 462만 마리의 개와 63만 마리 정도의 고양이가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렇듯 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어난 것은 경제성장에 따른 경제적 여유와 도시화에 따른 사람들이 겪게 되는 소외 그리고 동물을 키우면서 건강, 사회성, 정서, 심리적 안정과 신체적 측면의 긍정적인 효과들을 얻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물을 기르는 것이 아동의 대인관계 형성에 긍정적이라거나 노인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는다는 등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동물을 대하는 생각이나 호칭도 변화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키우는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영어로 하면 pet에서 companion animal로의 변화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두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애완 [愛玩][명사]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

반려 [伴侶][명사] 짝이 되는 동무

 

저 두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두 단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버리고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일까?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해야만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애완과 반려 두 단어 사이에 가장 명확한 차이는 주체主體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다.

애완은 주체가 사람이다. 사람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동물은 그저 대상이고 객체일 뿐이다. 사람이 좋아하면 데리고 있고 싫어지면 버리는 그런 물체일 뿐이다.

반면에 반려의 주체는 사람과 동물 모두이다. 짝이란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서 관계를 갖는 것이다. 흔히 부부를 인생의 반려자라고 한다.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어지는 것이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의지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왜 이러한 호칭이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동물이라는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은 동물은 그저 사람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다. 데리고 놀던지 타고 다니던지 아니면 잡아먹던지 그것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고 필요가 없어지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가령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는 동물은 자의식을 갖지 못하며 단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동물이나 식물은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연의 생명을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차별하고 인간의 욕구를 위해 수단시하고 객체화 하면서 발생하게 된 것이 생태계 파괴와 종의 멸종과 같은 문제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두된 문제 중에 하나가 생명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심각하게 문제 제기되는 것이 생명을 인간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중심적 생명관이다. 인간중심적 생명관은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인간의 필요성에 따라서 판단하고 소용 있는 것과 소용없는 것으로 나눠버리고, 있어야 할 것과 없어져야 할 것으로 구분해버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며 키우기가 불편해질 때, 즉 수단으로써의 용도를 다했을 때 스스럼없이 버리게 되는 것도 그 한 단편이다.

자연의 생명들은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가지며 생태계는 수많은 생명들의 건강한 관계 속에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것에서 나오는 것이 ‘생명권’과 ‘동물권’이라는 가치다. 이것은 ‘인권’이란 그 사람이 잘났든 못났든,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것과 상관없이 존중받을 권리를 지니는 것처럼 생명이라면 인간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침해할 수 없는 존엄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생명권이다.

이렇게 높아지는 생명권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집에서 기르는 동물 또한 단지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같이 살아가는 주체로 인식이 변화 되고 있다. 그 결과로 애완동물이라는 호칭이 반려동물로 변화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생명에 대한 고민의 확장에 따른 결과들이다.

이와 같이 집에서 키우는 동물의 호칭이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바뀌는 것에 대하여 의외로 수의사들 중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이유는 대체로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 대하여 애완동물이라는 호칭에서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동물병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픈 동물을 치료하다가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했을 때 예전에는 최악의 경우 다른 애완동물을 구입해주고 사건을 무마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키우던 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인식하는 경우 반려자를 잃었을 때와 같은 상실감을 겪게 되고 그에 따라 정신적 위자료 소송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반려자는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우려는 단지 우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료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정신적 위자료 소송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근거로 한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해볼 것은 그러한 수의사의 생각을 보호자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애완동물이라는 호칭에서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으로의 변환은 이미 대세가 되었다. 이렇게 대세가 된 바탕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인간중심적인 생명관에 대한 환경생태학적, 인문학적 반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들 학계에서는 인간중심적인 생명관을 탈피하여 생명중심적인 생명관으로 패러다임을 변환하기 위하여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 이들의 학술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동물보호단체들 또한 동물이라는 생명을 위하여 애완동물이라는 호칭에서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으로 바꿀 것을 홍보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들 속에서 보호자들도 동물을 위하여 변환된 호칭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반려동물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수의사들에게 불편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며 애완동물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면 학계나 동물보호단체 또 보호자들 중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난망(難望)한 일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동물에 대한 생각이 반려동물이라는 인식으로 바뀌었을 때 그것이 수의사에게 정말로 불이익이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물론 저가 중성화수술과 같은 덤핑진료를 하는 동물병원에서는 큰 불안요인이 될 것이다. 저가 진료를 위하여 혈액검사와 같은 안전망을 만들어놓지 않고, 싼 맛에 찾아온 보호자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다가 의료사고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싼 맛에 찾아온 보호자들이 말 많은 보호자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인식이 바뀜으로 인하여 가장 큰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은 수의사들이다. 저가 중성화수술 정책으로 고객을 유인하여 동물병원을 유지하는 수의사는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달라진 인식으로 인하여 예전 같으면 포기하거나 방치했을 질환이나 MRI와 같은 고가의 검사 등 다양한 진료행위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많은 수의사들은 예전에 비하여 고가의 진료가 가능한 분위기 속에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마인드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보호자들의 동물에 대한 이러한 마인드의 변화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에 의료비용이 몇 백 만원이 들더라도 검사를 하고 진료를 받는다. 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정신적 피해보상까지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부분은 수의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다른 부분은 수의사에게 불편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부분이다. 보호자들의 동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짐으로 인해 맺은 열매를 따먹으면서 단 부분만 삼키고 쓴 부분만 떼어내서 뱉어버릴 수는 없다. 수의사들이 보호자들의 동물에 대한 인식이 향상됨에 따라 이익을 얻는 측면이 있듯이 불가피하게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와 같은 경우 보상금에 대한 부담감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호칭이 바뀌는 것과 사람들의 마인드가 변화되는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 오늘날의 대세이기 때문이다. 수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이고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는 불의의 의료사고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다. 그것은 처치 전 혈액검사와 같은 방어적인 진료를 하거나 또는 의료사고 대비용 보험과 같은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이라는 말이 있다.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맞서겠다며 두 팔을 휘두르는 사마귀를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 동물이라는 생명을 단지 수단이나 객체로 인식하던 차원에서 생명 그 자체로 인식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와 사회적 함의가 수레바퀴와 같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이 수레바퀴는 학계와 동물보호단체 또 뜻 있는 보호자들에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도도한 흐름은 몇몇 수의사들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길지 모른다며 막아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세 속에서 동물을 상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의사들은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할까? 외부적으로 동물과 관련된 많은 이슈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수의사들이 동물을 위한 자세로 이슈를 끌고 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수의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까 한번 생각해볼 문제이다.

동물과 관련된 이슈에서 기득권에 얽매이기보다 동물을 위하여 진취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동물을 위해서도 좋고 또 장기적으로 수의사의 사회적 이미지 재고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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